퇴직 후 재취업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 어렵다. 이에 따라 인생 2막을 창업으로 시작하는 시니어가 늘고 있다. 하지만 창업교육과 지원은 청년층에 집중되고 있다. 시니어는 제대로 된 창업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창업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실패 확률만 높이는 셈이다.
17일 KOSIS(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지난 3월 50대 창업기업 비율은 22%, 60세 이상 창업기업 비율은 14%다. 50~60대 시니어의 창업 비율은 36%에 달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시니어 창업 정책은 ‘시니어기술창업’이 전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니어들은 창업시장에서 생존을 장담할 수 업는 ‘각개전투’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 도시재생지역인 서울 은평구 응암3동에서 복합문화공간 ‘마실’을 운영하는 김명희(60) 대표의 노력이 돋보이는 이유다.
김명희 대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폐업이 늘고 창업을 꺼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4월 창업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고 있다. 이른바 ‘경력단절’ 여성이면서 60대에 들어선 김 대표가 창업한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시니어창업의 롤모델(Role model)이 된 김명희 대표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업장 ‘마실’을 찾았다.
Q 60대에 접어들어 창업은 쉽지 않았을 덴데, 창업 계기는?
2020년, 예상치 못한 코로나 상황이 닥쳤다. 기관에서 하던 오카리나 강의가 줄줄이 취소됐다. 막막했다. 취미로 시작해 얻은 일인데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나만의 작은 연습실 겸 레슨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장소를 알아봤다. 하지만, 서울의 살인적 임차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도 기회는 찾아온다. 신중년 창업을 지원하는 ‘점프업 5060’ 프로젝트를 만났다. 운이 좋았다. 5개월 동안 열심히 배우고 실습한 결과, 43개 팀 중 13개 우수창업팀에 뽑혔다. 창업지원금을 받았고 2021년 4월, 드디어 내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마실’을 창업했다.
Q. ‘점프업 5060’은 어떤 사업인가?
점프업 5060은 ‘신중년 도시재생 창업지원 프로젝트’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 기획하고 진행했다. 나는 2020년 7월부터 시작한 2기에 참여했다.
점프업 5060은 신중년(만 50~64세) 창업가를 육성하기 위해 원스톱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프로젝트다. 1단계에서는 창업교육과 현장실습을 한다. 2단계에서는 최종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팀에게 전문가의 1:1 고도화 컨설팅 기회를 준다. 최종 우수창업팀으로 선정되면 사업화 자금으로 최대 2000만을 지원한다. 단, 도시재생 창업이어야 한다. 창업으로 지역 문제를 해결하고, 동네와 골목에 활기를 불어넣고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Q. 점프업 5060 사업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이 됐나?
당시 창업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사전에 제출한 사업계획서도 엉성했다. 이런 초보 예비창업자에게 가뭄에 단비였다. 비록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이 대부분이었지만 수준 높은 전문가 강의를 주 2회 하루 4시간씩 들었다. 사업계획서 작성 교육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실질적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마케팅과 음향 분야 전문가 컨설팅도 창업에 자신감을 불어 넣었다. 자본금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업비지원금 1720만 원은 든든한 힘이 됐다. 다소 부족했지만 방음 시설과 인테리어 비용에 충당했다.
Q. 우수창업팀으로 선정된 비결이 궁금하다.
점프업 5060 사업에 참여하기 전, 서울시 기관이 운영하는 문화기획자 과정을 수강했다. 수료 후 강사 소개로 ‘문화도시 협업가’ 모임에 참여해 광양, 남원, 부여 등 지방 도시의 도시재생 이야기를 들었다. 이때, 문화콘텐츠로 특별한 사업을 펼치는 사례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호기심이 발동해 서울의 해방촌, 후암동, 서계동, 회현동 등지의 도시재생 사례지역을 탐방했다. 이런 경험 덕분에 도시재생 창업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점프업 5060 프로젝트 취지에 맞는 사업을 계획해 인정받았다. 역시 정답은 현장에 있었다.
Q. ‘마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은?
‘마실’은 지역주민들이 마실 가듯 가볍게 방문하는 곳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각종 문화예술 활동을 경험할 수 있다. 마실은 지난해 이어 올해도 은평구 평생학습관 ‘우리동네 배움터’로 선정됐다. 7개월 동안 5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캘리그라피’와 ‘낭독극’ 수업은 이미 끝났고, 초등학생 ‘오카리나’ 교육과 성인 대상 ‘사부작 목공’ 수업은 진행 예정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어르신 문화활동지원사업도 있다. ‘은빛나래 이야기 보따리’ 프로그램이다. 그림책연구소 배홍숙 연구원을 초빙해 그림책을 함께 읽고 느낌을 서로 나눈다. 이 프로그램은 이야기 봉사단으로 활동할 60세 이상 어르신이 대상이다. 그림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읽지만, 어르신들께도 적합한 책이다. 글과 그림이 적절히 들어가 있어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께 부담이 없다. 그림을 보면서 추억을 회상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구연동화, 뜨개질을 활용한 소품 만들기도 진행할 예정이다.
Q. 무대가 있으니 공연도 하고 대관도 하지 않나?
공연하려면 방음이 필수다. 마실은 지하에 있고 방음 시설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음향 장비도 사용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은평구 싱어송라이터 ‘레이린’ 공연을 이곳에서 영상으로 담았다. 11월에는 은평구 동아리 공연인 ‘모두의 예술제’가 열렸고, 올해 1월에는 은평구 시민극단 ‘불터만’의 낭독극 공연도 했다.
대관도 수익사업 중 하나다. 지난해에는 시니어 ‘젬베’ 팀이 1년 동안 정기대관을 했다. 올해 5월부터는 마을 사물놀이팀 어르신들이 주 1회 정기대관을 하고 있다. 북, 장구 등 부피가 큰 악기들을 보관해드리니 어르신들 만족도가 높다. 신명 나게 합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구경꾼인 나도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Q. 일터인 마을에서 어떤 일을 돕고 있나?
마을문화교실에서 어르신들에게 ‘칼림바’ 악기 연주를 무료로 지도하고 있다. 칼림바는 오카리나보다 짧은 시간에 쉽게 배워 연주할 수 있는 작은 악기다. 한편으론, 다래마을 주민협의체 회원으로 들어가 마을 행사에 참여하면서 마을 일을 돕고 있다. 요즘은 마을 환경교육을 기획, 추진하고 있다. 골목마다 담배꽁초와 커피 마시고 버린 종이컵이 방치돼 있어 안타까운 마음에 시작한 사업이다. ‘쓰레기책’ 저자인 이동학 작가를 초빙해 ‘다래마을 꿈터’에서 주민 대상 환경교육을 하고 있다. 이동학 작가는 세계여행을 떠났다가 목격하게 된 쓰레기 문제를 생생한 사진과 함께 보여줬다. 2년간 지구 곳곳을 다니며 보고, 듣고, 깨달은 쓰레기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이 따라온다. 작은 행사지만, 이를 기점으로 주민들이 마을 쓰레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자발적으로 정화 활동에 나서길 기대한다.
‘2022 다래마을 골목축제’ 기획단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축제 마지막 행사인 6월 18일 ‘다래마을 골목 음악회’ 기획과 운영을 전담해 마을 사람들이 화합하고 즐기는 축제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Q. 마실을 운영하면서 안타까운 점도 있었을 텐데.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사업만으로는 수익을 내기 어렵다. ‘우리동네 배움터’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면 플래너 자격으로 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강사비와 재료비를 빼면 내 손에 쥐는 돈은 매우 적다. 대부분 수강비를 받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어르신 지원 사업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 주민들이 마실을 이용하기 힘든 점도 아쉽다.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대료가 저렴해 잘 버티고 있다.
그렇다고 앞이 캄캄한 건 절대 아니다. 마실에서 기획해 진행한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 인스타그램, 블로그, 입소문을 통해 마실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내 거주지는 아니지만, 일터인 다래마을에서 주민들을 돕는 일들이 많아 세상 사는 맛이 난다.
Q. 사업가로서 계획과 꿈이 있다면.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들, 찾아보니 상당히 많다. 당분간은 마을 일에 집중하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오카리나 강의도 꾸준히 할 것이다. 창업할 때 가졌던 생각처럼, 공간만 있다면 해볼 만한 재미난 일들을 차근차근 하나씩 하려고 한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꿈! 멋지지 않은가? 마실 공간에서 주민들이 자신을 재발견하고 공동체 문화 활동의 기쁨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Q. 창업에 관심 있는 예비 창업가에게 조언한다면.
시니어가 창업을 준비할 때는 기존 경험을 바탕으로 창업해야 성공 확률이 높다. 완전 생뚱맞은 다른 분야를 창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신의 관심사나 취미 영역에서 아이템을 잡아 창업하길 권한다. 지치지 않고 계속 사업을 이어가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또한 창업지원 프로그램을 찾아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뒤 창업에 뛰어들기를 바란다.
도시재생 창업은 기존의 창업시장과 조금 다르다. 이윤 창출에 더해 지역사회의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 가치를 담아내야 한다. 신중년에게 창업 기회와 지원을 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보길 바란다. 시니어의 창업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