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황복실 기자] “태어나줘서 고마워!”
영화 ‘브로커‘ 의 대사다. 주인공 소영은 그 말이 쑥스러워 꺼내기가 어렵다. 방 안의 불을 끄고서야 함께 있는 사람을 한 사람씩 호명하며 말한다. 어쩌면 영화를 통해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이리라.
요즘 방송을 보면 가정의 해체와 아이들의 사회 부적응을 다룬 프로그램들이 많다. 그들은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과 몸이 아프고 불안하다. 살펴보면 대부분 부모사랑의 부재다. ‘금쪽같은 내새끼‘의 오은영 박사는 수시로 말한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무척 사랑한다고. 부모가 처음이라 서툴러 방법을 모를 뿐이라고 한다. 그 사랑을 알 수 있도록 부모는 질긴 동아줄이 돼줘야 한다고 설득한다. ‘브로커‘의 주인공 소영도 자식에 대한 나름의 사랑은 존재했다.
영화 ‘브로커‘에서 소영은 왜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넣지 않고, 바닥에 내려 놓았을까?
‘브로커‘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의뢰를 받아 그를 대신하여 상행위를 하고, 쌍방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사람이다.
영화 ‘브로커‘는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들은 버려진 아기를 빼돌려 일방적으로 인신매매를 하는 범법자들이다.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니고, 쌍방으로 수수료를 받는 것도 아니다. 범법행위니 마땅히 붙일 제목도 없다.
영화는 비가 쏟아지는 밤, 언덕길을 한참 올라야 하는 낡은 동네에서 시작된다. 교회 한편의 베이비 박스 앞에서 어린 소녀 소영이 한참을 서성인다. 한눈에 봐도 아이를 베이비 박스에 넣기 위해 온 모양새다. 서성이던 소영은 입고 있던 우비 속에 감춘 아기를 꺼내 땅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도망치듯 사라진다. 베이비 박스가 아닌, 왜 비가 내리는 바닥에 아기를 내려놓았을까.
소영은 성매매를 하는 여성이다. 아기는 그 과정에서 태어났고, 아기 아빠를 죽인 살인자다. 그런 부모의 짐을 아기에게 지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아기를 곁에서 잘못되게 할 수도 없다. 마치 운명을 하늘에 맡기듯, 누군가에게 발견되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상황을 택한 것이다.
그랬던 소영은 다음 날 아기를 찾으러 간다. 아기는 이미 암거래하려는 두 남자에 의해 사라진 후다. 얼마 후, 소영은 아기를 되찾았지만, 매매하려는 두 남자의 여정에 동행하게 된다. 좋은 양부모에게 아기를 맡기고 싶은 소영의 행보다. 그러나 인신매매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려는 형사 때문에 뜻을 이루기 어렵다. 이들의 이야기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는 어떤 말이 하고 싶었을까.
사회의 냉담함에 자신은 무관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그의 영화는 대부분 회색이다. 많은 상황을 던져 놓고 관객에게 묻는 열린 결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안긴다. 그 후, 관객 스스로 많은 질문을 하게 한다.
한 예로, 영화 ‘어느가족‘은 소외된 이들의 평범치 않은 가족이야기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대응한다. 그들에게 이미 상식은 없고, 생존 방법만 존재한다. 그렇다고 서로가 끈끈하게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무심히 먹고, 자고, 뒤엉킨 듯 산다. 그렇게 관계는 계속된다. 영화를 미화시키지도, 작위적이지도 않다. 어떤 결말이 날지 기대조차 어렵다. 그냥 계속되는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이때, 관객은 스스로 묻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과연 그 질문이 끝일까. 영화의 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내면 문제를 찾기 시작한다. 이어서 사회의 냉담함에 자신도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 아기를 낳기 전과 낳은 후 죄의 무게
뒤쫓던 형사 수진이 묻는다. 버릴 거면 왜 낳았느냐고. 소영은 아기 앞에서 그렇게 말하라면서 무심히 반문한다.
“아이를 낳기 전에 죽이면, 낳고 나서 죽이는 것보다 죄가 가벼워?”
배 속에 있던 아기와 눈앞에 보이는 아기는 같다. 이론상으로 충분히 공감되는 반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눈앞의 아기에 관해서만 죄를 묻는다. 나머지 죄의 무게는 각자의 몫이다. 감독은 그 무게를 꼬집어 내면을 보게 하는 마력의 질문을 던진 것이다.
소영에게도 모정이 존재했을까?
소영, 상현, 동수, 꼬마 해진은 아기를 사겠다는 사람을 찾는다. 가격과 아기에게 맞는 양부모 찾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아기를 중심으로 여러 날 같은 공간에 머물며 생활한다. 모두가 상처 입은 소외계층이다. 상현은 능력 없는 이혼남이고, 동수는 보육원에서 자랐다. 해진은 입양되고 싶어 몰래 따라온 아이고, 소영 역시 버려진 아이로 성매매를 하며 살았다. 이들은 아기를 함께 돌보며 서로를 통해 내면을 위로받는다. 아기를 어르지도, 잘 안지도 않던 소영이, 아기가 열이 나자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며 동수는 자신을 버린 엄마도 같았을 거라 말한다. 자신을 버렸지만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며, 엄마를 이해한다. 또, 가족에게 철저히 외면당한 상현은 소영의 아이를 통해 자신의 딸의 존재가 더 애틋하다. 그들은 방 안의 불을 끈다. 그리고 소영이 모두의 이름을 각각 호명하면서 위로한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소영아, 태어나줘서 고마워!”
버려진 것과 지켜진 것
소영은 아기를 사려는 윤 씨 부부에게 아기를 맡기고 싶다. 아기를 귀히 여기며 자신의 젖을 물리는 모습에 감동한다. 소영이 당당하지 못하자, 윤 씨 부부는 “아기가 버려진 게 아니라 지켜진 거“라며 위로한다. 소영의 마음이 흔들린다. 이즈음, 인신매매범을 현행범으로 체포하려는 형사 수진은 소영을 설득한다. 자수하면 길어야 3년 살고 나오니 상현과 동수를 신고하라고. 소영은 동의하며 그들을 배신한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답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대신 상현의 트럭 룸미러에 달려있던 가족사진이 이들의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아기를 지키는 것에 동의했다는 미장센이다. 또, 밝은 모습의 소영이 주유소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형사 수진과 함께 크던 아기는 수진의 내레이션과 함께 나타난다. 내레이션은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고 윤 씨 부부의 소식을 전한다. 또 잘 키울 수 있도록 의논하자고 한다. 장면이 바뀌고 소영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모습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브로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여느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주제를 겉으로 많이 드러낸 것도 그렇고, 어느 정도의 결말을 보여준 것도 그렇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것을 각각의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선명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