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추미양 기자] 100세 시대를 맞아, 길어진 노년을 어떻게 보낼지 시니어들의 고심이 많다. 퇴직하여 경제활동과 사회활동이 줄어들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삶에 활기가 떨어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걷고 헬스를 하지만 재미가 없고, 젊은 시절 시간이 없어 미루었던 취미생활이나 하면서 지내자니 노후 자금이 넉넉지 않다. 그럼 어떻게 사는 것이 재미있고 행복할까?
인천에서 만난 이순향(63) 씨는 아직도 현역처럼 보인다. 무역회사에서 명퇴했지만 여러 직업을 가진 N잡러다. 취미로 시작한 글, 사진, 여행이 직업이 되었다. N잡러는 2개 이상의 복수를 뜻하는 N, 직업을 뜻하는 JOB, 사람을 뜻하는 러(er)가 합쳐진 신조어다. ‘사진작가’인 그는 여행을 주제로 글을 쓰고 강의도 하는 ‘여행작가’이고, 인천 구석구석을 알리는 ‘인천문화관광해설사’이며, 인천시 연수구 내 행정복지센터에서 업무를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사회의 주인공처럼 활동하는 그는 어떻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N잡러가 되었을까?
1. 여행작가_남편의 말이 씨가 되다
그의 글솜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백일장과 각종 글쓰기 대회에 나가면 장원이나 우수상을 매번 거머쥐는 문학소녀였다. 고인이 된 박완서 소설가를 늘 모델로 삼고 작가의 꿈을 갖게 되었고, 직장에 얽매일 때도 시집을 품에 안고 다니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퇴근 후 가까운 문화센터를 찾아 시를 공부했다.
그가 여행작가의 길을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남편의 말 한마디였다. 퇴사를 고민하던 2014년, 남편이 신문 한 귀퉁이를 오려서 내밀었다.
“당신에게 딱 맞는 수업이 있네”
한국경제신문 여행작가 아카데미 1기 모집 공고였다.
“여행 좋아하고 사진 취미와 글솜씨가 있으니 도전해 봐~”라는 격려에 덜컥 신청했다. 퇴사하면 여행도 가고 사진 찍고 싶은 소망도 이룰 기회였다. 답답한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퇴근 후 열심히 아카데미 강의를 들으며 여행작가의 꿈을 키워갔다. 미얀마 취재 기회를 얻었고, 미얀마 여행 기사가 한국경제신문에 게재되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여행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여행잡지인 ‘트레비’에서 원고 요청이 들어왔고 본격적인 여행작가 활동을 하게 됐다.
2. 인문학 강사_영종도서관과의 인연
2019년 영종도서관의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인 ‘여행의 시작과 끝’ 강좌를 맡게 됐다. 매주 토요일, 영종도 주민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표현하고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모였다. ‘영종도, 그 길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합집(合集)을 만들고 10여 명 주민이 개인 에세이집을 만들었다. 이 프로그램은 주민들의 반응이 좋아 2020년에도 계속됐고 합집인 ‘푸르기만 한 봄은 없다’를 출간했다.
길 위의 인문학 강의를 할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 강의 첫날,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워킹맘이다.
“얼굴에 고단함이 묻어있던 제자는 내 첫 강의를 듣고 바로 사표를 내겠다고 했어요. 신중해야 한다며 말렸지만 헛수고였지요. 젊은 엄마들에게 꿈을 갖게 하는 책을 쓰고 싶다며 ‘엄마도 꿈이 있어’라는 책을 출간했어요. 2년 뒤에는 ‘마법의 꿈지도’ 책도 썼지요. 작가가 되어 강의와 독서 모임으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제자를 보면서 어릴 적 꿈인 선생님이 된 것 같아 참 기뻤답니다”
3. 문화관광해설사_인천 역사·문화를 알리다
그는 서울이 고향이고 직장도 줄곧 서울에 있었지만, 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언니와 함께 돌보기 위해 2000년 인천으로 이사했다. 출퇴근 시간이 길어져 힘들었지만, 전에 몰랐던 인천의 매력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누구보다도 인천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천’ 하면 가장 먼저 인천국제공항이 생각날 것이다. 하지만 인천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국내 어느 도시보다도 개항이 남긴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역사를 좋아해서 혼자 공부를 많이 했어요. 서울에 살 때는 국립민속박물관의 박물관 대학을 다니며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유적을 공부했죠. 인천으로 이사 와서는 가장 먼저 문화 단체를 찾아 후원과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는 재직 중이던 2009년부터 5년간 주말마다 박물관 등지에서 인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했다. 힘들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력이 감당을 못해 잠시 쉬다가 2020년 재도전하여 인천을 찾는 분들에게 관광 정보를 제공하고 관광지 해설 서비스를 하고 있다.
4. 여행대학 리더_‘시니어 꿈꾸는 여행자’
야놀자 계열사 ‘여행대학’이 ‘시니어 꿈꾸는 여행자 과정‘ 수강생을 모집했다. 이 과정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관광협회중앙회가 주관하는 여행 교육 프로그램인데, 60세 이상 시니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다.
그는 5기를 수료한 뒤 현재 여행대학 리더로 활동하고 있다. 거주지인 인천을 대상으로 관광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직접 안내하는데, 일반 가이드와 달리 관광객이 직접 사진을 찍고 이에 대한 글을 쓰도록 돕고 있다. 즉 여행, 글, 사진이 협업 된 프로그램을 기획, 진행하고 있다.
5. 사진작가_문래동 사진으로 이름 날리다
그는 20여 년간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카메라는 내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진작가다. 가르거나 쪼개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온새미’를 필명으로 사용한다.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에 이어 개인전도 한 그는 문래동에 쌓여있는 파이프를 다양한 시각으로 담아냈다. 특히 녹슨 금속의 단면에서 오묘한 우주를 상상하게 하는 사진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요즘은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SNS가 발달하여 글보다는 사진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특히, 멋진 여행지를 가면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고 싶어 한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초점, 노출 등을 알아서 해주니 촬영 시 구도가 중요해요. 셔터를 누르기 전에 피사체를 한 바퀴 돌아보고 마음속으로 정한 사진 제목과 어울리는 앵글을 잡지요. 코스모스 찍을 때와 해바라기 찍을 때가 다르잖아요. 위 또는 측면에서 찍을 수도 있고, 부분 또는 전체를 담을 수도 있지요”
그는 여행 사진을 어떻게 촬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강의도 맡았다.
“한국경제신문 여행작가 동문팀이 쿠바 여행을 기획하면서 사진 강의를 의뢰했어요. 쿠바를 다녀와 사진전을 열고 사진집을 만들고 싶다면서요. 저는 여행 떠나기에 앞서 ‘쿠바’ 하면 떠오르는 올드카, 바다, 헤밍웨이, 춤, 음악 등등의 주제를 생각해 보고 공부하라고 조언해요. 영화도 보고요. 그래야 똑같은 사진이 안 나오니까요. 컨셉을 가지고 촬영하면 차별화된 나만의 사진집을 만들 수 있답니다”
전문적인 사진이 아니더라도 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에 일상을 담은 사진을 남기려는 시니어들을 위한 사진 강의도 틈틈이 하고 있다. 그에게 사진은 어느 것보다도 소중한 취미이며 끝까지 함께할 친구다.
6. 시인_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꿈
그는 자원봉사도 일만큼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실천한다. 지난해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월간지 ‘굿모닝 인천’ 전체를 음성으로 녹음하는 목소리 봉사를 했다. 인천 시민으로서, 소리로 듣는 독자들에게 인천의 문화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어 자원했다고 한다. 자신의 재능으로 이웃을 돕는 것은 본인에게도 축복이고 행복이다.
N잡러로서 경제적 수입은 물론, 좋아하는 일을 하며 매일 즐겁게 생활하고 있는 이순향 씨에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언어로 시를 써서 읽는 분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책을 만들고 싶어요. 사진이 글이 되고 말이 되는 책이요. 시인은 제 청춘의 꿈이었어요”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시니어일지라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고 꿈을 향해 미래로 나아가는 이순향 씨. 도전은 항상 아름답다. N잡러의 또 다른 꿈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