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이길상 기자] 우리나라 국민들이 생계를 위해 70대 초반까지 쉼 없이 일하는 상황에서 정년연령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올리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실적으로 실질은퇴연령이 70대 초반인 데다, 적어도 65세까지는 일할 수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법적 해석이 최근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70세 이상 저학력 노인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최대치를 넘어 과도하게 생계형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노후보장제도 부족으로 노인들이 쉬고 싶어도 먹고살기 위해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또다시 입증됐다.
따라서, 기대수명이 80세 초반까지 늘어난 현실을 반영해 조기퇴직을 부추기는 연봉제를 대체할 임금체계 도입 등 적어도 65세까지는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지금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조기퇴직 부추기는 임금체계
노년기 복지제도가 미흡한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주된 경력을 쌓은 회사에서 쫓겨나는 연령은 50대 초반이다. 근속연수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급여를 받는 호봉제 탓이 크다.
최근 산업은행 미래전략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주된 일자리의 은퇴연령은 평균 49.1세다. 이런 ‘조기퇴직’은 호봉제 임금체계와 무관치 않다. 조직 기여도는 적은데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보상도 많아지는 구조다.
중·장년 정규직 근로자들이 50세도 되기 전에 퇴직당하는 배경이다. 호봉제 임금체계를 가진 사업체는 2016년 기준으로 60%에 달한다. 특히, 임금수준이 높은 금융산업에선 90% 이상의 사업체가 호봉제 임금체계를 갖고 있다.
당장 시급한 임금체계 개편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되고, 고령사회로 접어든 시점에서 연공서열식 호봉제로는 기업도 근로자도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정치권과 정부가 나서 지금부터라도 합리적인 임금체계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임금피크제가 추진됐고, 성과급제도 도입됐지만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2016년부터 정년 60세가 단계적으로 도입되면서 법에 정해진 ‘임금체계 개편’ 논의가 사문화됐다.
당초 임금피크제는 한국노총이 참여한 노사정 합의를 기반으로 2017년부터 도입됐다. 그러나 올해부터 임금피크제 도입 기업에 대한 정부지원이 사실상 사라졌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공공기관이나 금융권조차 폐지 또는 임금삭감 정도를 완화하자는 주장이 노조를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노사정이 머리를 맞대고 일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한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임금체계 논의를 지속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70대 초반까지 일하는 현실 재입증
우리나라의 주된 일자리 은퇴연령은 평균 49.1세인데도, 우리나라의 실질은퇴연령은 70대 초반에 달한다. 생계를 잇기 위해서다.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노인의 건강과 은퇴연령 조정연구’란 보고서는, 우리나라 60세 이상 고령 남성들은 건강 수준을 훨씬 초과해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법적정년 이전 연령대인 55~59세를 기준으로, 다른 요소는 배제하고 건강 상태가 이 연령대의 근로 여부에 미치는 영향력을 도출했다. 이 같은 방법을 60세 이상 고령층에도 똑같이 적용, 고령층의 건강 수준에 따른 가상의 ‘추정고용률’을 산출했다.
이 추정고용률을 실제고용률과 비교했을 때 나타나는 차이가 ‘얼마나 더 일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근로여력이다. 근로여력이 낮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 연구는 현재 사회적으로 논의 중인 정년연장, 연금제도 개편 과정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실제 노인의 건강 상태와 근로여력이 어느 수준인지 파악하려는 취지로 진행됐으며,
KDI, “70대 촌반까지 과로 시달려”
건강 상태가 양호하더라도 고령에는 일을 줄이거나 은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KDI 연구결과 우리나라 고령층은 70대 초반까지 오히려 건강 수준 이상의 과로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60세 은퇴연령이 현실적이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KDI에 따르면, 중졸 이하 고령 남성 가운데 70~74세 연령대의 실제 고용률(40%)은 추정 고용률(39%)보다 오히려 높아 근로여력이 -1%포인트로 나왔다. 이는 건강 수준을 넘어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다.
65~69세 중졸 남성은 실제 고용률과 추정 고용률(각각 52%)이 같아 근로여력이 0%포인트였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일한다는 의미다. 60~64세 중졸 남성의 경우는 실제 고용률(66%)이 추정 고용률(67%)보다 낮았지만 차이는 1%포인트에 불과했다.
KDI는 “60세 이상 고령 남성은 현재 건강 수준에서 이미 포화 수준으로 근로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노후보장제도의 미성숙 같은 제도적 요인과 이에 따른 노인빈곤 문제 때문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가동연한 65세 상한에 따라 일하는 연령도 확대
지난 2019년, 일반육체노동자의 가동연한을 이전 만 60세에서 만 65세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후폭풍이 거세게 일었다. 대법원 판결 이후 실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일실수입을 60세가 아닌 65세로 재산정하라며 사건을 하급심으로 되돌려 보내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덤프트럭 기사 이모씨는 2015년 11월, 자신이 몰던 덤프트럭 정비를 A씨에게 맡겼다가 A씨 과실로 자동차 부품을 오른쪽 눈에 맞아 영구적인 시력 손상을 입어 소송을 냈다. 1·2심 재판부는 트럭기사 이씨의 가동연한을 60세로 보고 손해배상액을 산정했지만, 대법원은 65세로 보고 재산정하라고 판결했다.
미용사로 일하던 정모씨가 턱 수술을 받아 감각저하 장애를 겪으면서 노동능력을 상실했다며 의사 박모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가동연한 65세가 적용됐다.
재판부는 “의사 박씨는 미용사의 가동연한은 만 55세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반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또는 육체노동을 주로 생계활동으로 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만 65세까지 가동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경험칙상 합당하다”고 판결하는 등 법적 정년연령은 65세로 굳어지고 있다.
일본 2013년부터 65세..미국 영국에는 없는 정년
정년연장은 세계적인 추세다. 의학기술 발전과 삶의 질 향상으로 수명이 길어지면서 최대한 오랫동안 일하게 하려는 경향이 짙다. 정부의 재정을 고려하면 늘어나는 고령인구를 연금으로 부양하기 어려운 탓이다.
일본은 2013년부터 법적 정년을 65세로 정했다. 60세부터 5년 동안은 노동자가 일하기를 희망할 경우에만 가능하도록 명시했었지만, 금융·건설업계를 중심으로 65세까지 정년을 보장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년을 70세로 올리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미국과 영국에는 정년 기준이 없다. 미국은 기존 70세였던 정년을 아예 없앴다. 영국도 기존 65세였던 정년 기준을 폐지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은 고용차별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2023년까지, 스페인은 2027년까지 정년을 65세에서 67세로 높일 계획이다. 노르웨이는 공식 은퇴연령이 67세이고, 이탈리아는 66세다.
주요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연금재정 고갈을 우려하는 우리나라는 연금을 포함한 노후보장체계가 선진국보다 한참 뒤떨어진다는 점에서 최소한 65세까지는 법적 보호를 받으며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