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도 흠모한 천민출신 선비, ‘촌은 유희경’

예의가 바르고 학식이 높은 이를 영국에서는 신사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동일한 개념으로 조선의 선비를 들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선비란 유교 이념을 구현한 신분계층으로 학식과 인품을 갖춘 이들을 뜻하는데, 이들은 안빈낙도와 청렴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백성들에게 올바른 모범이 되었고 조선을 실질적으로 이끈 지식인 계층이었다. 또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선비는 반드시 양반 출신의 남자여야 했다.

재밌게도 타고난 훌륭한 인품과 명석함으로 천민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 사대부들에게조차 존경을 받을 정도로 올바른 선비의 삶을 살아낸 이가 있는데 ‘이매창’과의 애절한 사랑으로 알려진 예학자이자 신석정 시인께서 ‘부안삼절’로 직소폭포, 유희경, 이매창을 꼽으실 만큼 시인으로서도 유명한‘촌은 유희경’이다. 오늘은 이매창과의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주인공이 아닌 신분을 초월해 선비로서 삶을 오롯이 살아낸 선생의 발자취를 좇고자 한다.

유희경의 저서 중 하나인 ‘촌은집’ 속지.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 호는 ‘촌은’으로 인종 1년 한양 대묘동에서 태어난 유희경은 비록 한자로 표기되었으나 조부의 이름이 ‘유도치’, 부친은 ‘유업동’으로 적힌 것으로 보아 출신이 천민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성품이 신중하고 현명한 이로 검소하게 살았음을 남겨진 여러 기록에서 알 수 있다.‘유몽인’의 <유희경전>에 “그는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사람이 깨끗하고 충성스러웠다. 주인을 섬기는 마음이 깍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고 적혀 있고, ‘허균’의 <성수시화>에는 “유희경이란 자는 천한 노비다. 그러나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촌음집> 제2권에는 “유희경은 토지가 없어 가난하게 살았는데 요금문 밖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고 전하고 있다. 유희경의 훌륭한 인품은 타고난 것으로 어릴 적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형제애가 남다른 소년이었다. 30년 동안 병으로 앓아누웠던 어머니 배 씨의 배변을 손수 받아냈고, 동생이 염병에 걸리자 피신하지 않고 동생을 극진히 간호하여 완쾌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지극한 효심과 형제애에 감동한 하늘의 배려인지 유희경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고단한 삶을 벗어날 수 있는 그 첫 번째 인연을 만나게 된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수락산 자락에 부친의 시신을 묻으려 하던 유희경은 고관의 묘지기에게 쫓겨나게 되고 사헌부에 고소장까지 제출하여 끝내 아버지의 시신을 묻을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장례를 마친 선생은 매일 무덤 앞에서 곡을 하고 흙을 져 무덤에 오가는 계단을 만들어 외로운 여막살이를 시작한다. 조선 최초로 양명학을 받아들인 당대 대학자이자 서경덕의 제자인 ‘남언경’이 이를 기특하게 여기고 그를 직접 찾아온다. 남언경은 초막을 짓고 매일 유희경에게 죽을 갖다 주라고 망월암 승려에게 부탁하며 유희경이 여막살이를 조금이라도 편히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부친의 삼년상을 마친 유희경은 그 뒤 남언경의 제자가 되어 예학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스승의 깊은 은혜를 갚고자 그는 남언경을 도와 도봉서원 창건에 힘을 쏟았다고 전한다. 남언경 문하에서 수학 뒤, 예학의 전문가가 된 그는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초빙되어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유희경의 부탁으로 ‘임상도’를 그렸던 이징의 ‘금니산수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유희경의 생애에 첫 전환점이 스승 남언경과의 만남이라면 두 번째 전환점은 바로 임진왜란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의협심이 강한 그는 의병을 모집하여 용감히 싸운 공을 인정받아 천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명의 사신들을 위한 호조의 비용 마련을 위한 방법으로 부녀자의 반지를 거두는 계책을 알려준 공로를 인정받아 선조에게서 통정대부직을 받는다.

힘든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난 그는 편한 꽃길을 걷기 위해 비굴한 처세를 선택하지 않고 선비로서 꼿꼿한 길을 걷는데, 이러한 유희경이 삶의 태도가 양반 출신의 사대부들에게조차 추앙받는 이유일 것이다. 광해군 9년에 평소 친분이 있던 대북파 이이첨의 주도로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자, 유희경은 이를 옳지 않다 보고 이이첨의 집에 발길을 끊어 버리고 상소를 올리자는 그의 부탁조차 거절한다. 이것을 괘씸하게 여긴 이이첨은 그 뒤 허균의 역모사건을 수사하며 그를 잡아들였지만 무고하였기에 결국 풀어주게 된다. 이후 인조는 유희경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며 종2품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고, 인목대비는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이 그를 찾을 때마다 술과 안주를 내리며 고마운 마음을 전달했다고 한다. 한겨울 내리는 차디찬 눈에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는 대나무처럼 절개와 의리를 지킨 선생의 모습은 선비의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뛰어난 학자일 뿐 아니라 시재를 타고난 유희경은 영의정을 지낸 사암‘박순’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워 시인으로서 당대 문인들과 어깨를 겨룬다. 당시 노비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백대붕’과 함께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만들어 ‘박계강’, ‘정치’, ‘최기남’등의 중인들과 시회를 즐겼고, 낙산 아래쪽에 흐르는 시냇가에 침류대를 지어 ‘차천로’, ‘이수광’, 신흠‘, 김현성’, ‘홍경신’, ‘임숙영’ 등 문인으로 이름이 드높았던 이들과도 시회를 열었는데 그때 교류한 흔적으로 <침류대시첩>이 있다. 이 침류대를 찾았던 이들은 화담 ‘서경덕’ 계열의 명사로 그의 스승이 남언경이었기에 그들과 교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이 남긴 작품 중 <차영국동유거운(次寧國洞幽居韻)>이란 시를 소개해본다. 도봉산에서의 그의 일상을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벼슬에서 물러나 조용한 하루하루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노년의 삶 속에서 유희경의 풍류를 즐기는 소박한 품성을 엿볼 수 있다.

“저녁에는 띳집을 얽어매니 안개속이요, 낮에는 사립문 닫고서 나가지 않는다네. 이웃 노인은 일찍이 예의를 알지 못하여 담 너머로 나를 노경사(老經師)라 부르네.”

유희경이 머물었던 ‘침류대’ 주변으로 추정되는 창덕궁 뒤 옥류정. 출처 : 다음백과

권력만을 좇아 자만하지 않고 겸허하게 선비로서의 여정을 걸어간 유희경을 보며 선생이 여든이 넘어 만난 택당 ‘이식’이라는 인물은 그를 “인격이 돈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곧은 면모를 보이는 가운데 시인들이 흔히 보이는 옹고집이 하나도 없으므로 낮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명성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칭찬했다고 전한다. 천출로 태어났으나 훌륭한 인품과 명석함으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였고, 학자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자 목숨까지 던질 정도의 용기를 지닌 그는 선비의 표준이라고 감히 칭할 수 있겠다. 당시에 드물게 92살까지 장수한 그는 죽을 때까지 많은 사대부의 존경을 받았다.

인맥과 돈을 좇는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며 심지어 과장하며 부풀리기까지 한다. 타고난 인품과 명석함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고도 현명한 처세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선비 유희경은 허위와 과장이라는 거품 속에 모든 것을 감추려 드는 얄팍한 삶의 자세에 경종을 울리는 훌륭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안분지족의 삶은 주어진 현실을 그저 받아들이는 수긍이 아니라 절제할 줄 아는 선비의 태도이다. 더 갖고자 앞만 바라보는 과욕을 잠시 접어두고 선비들처럼 고고한 삶을 살아내지는 못하더라도 현실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까운 이들을 한 번 더 챙기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각박한 일상 또한 살아낼 만한 가치 있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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