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위대한 건축가, ‘박자청’

세계적인 건축가를 떠올리면 몇몇 이름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집트의 ‘임호테프’, 스페인의 ‘가우디’,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등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걸작들을 남긴 위대한 건축가들이 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뛰어난 건축가를 우리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오늘은 조선 초기에 활약한 ‘박자청’을 소개하고자 한다.

4년 전 한 역사관련 프로그램에서 ‘조선의 미켈란젤로’라고 평하며 조선 개국 초기 한양의 기반을 닦는 주요 건축물을 남긴 박자청과 그가 지은 ‘창덕궁’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손꼽힐 건축물들을 여러 개 남긴 그의 뛰어난 창의력과 예술성이 걸작들을 남긴 주요한 바탕이 되었겠으나, 필자가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그 강인한 의지와 어떤 비난을 가하더라도 흔들림 없이 꿋꿋이 앞만 보고 걷는 추진력, 그리고 죽을 때까지 변치 않은 성실성이다.

박자청이 8개월만에 완공한 국보제224호 ‘경회루’. 출처 : 네이버포토

박자청을 두고 현대 건축가들과 역사가들이 ‘정도전이 조선의 한양의 모습을 기획한 설계자라고 한다면 박자청은 한양의 실제 모습을 만들어 낸 건축가’라고 높이 평가할 정도로, 개국 초 수도인 한양의 기본 틀을 갖추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태종은 조선이 세워지고 혼란한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새 나라에 헌신할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있었고, 박자청은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인재였다. 박자청은 자신을 믿어준 왕을 위해 평생을 다해 아낌없이 기량을 발휘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우직한 성실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이 천부적인 재능으로 종3품까지 올랐지만, 박자청은 종1품 의정부 참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말하자면 박자청은 노비에서 재상까지 된 진정한 능력자라고 볼 수 있겠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설치된 배다리를 그린 ‘노량주교도 섭도’. 박자청이 고안한 부교를 본따 만든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출처 : 네이버포토

본관이 ‘영해’인 그는 원래 조선의 개국공신 ‘황희석’의 노비였다. 박자청이 왕의 눈에 들어 출세하게 된 사건은 매우 극적이다. 고려 조 낭장이었던 박자청은 조선 개국과 함께 중랑장으로 승진하여 궐문을 지키고 있었다. 태조의 이복동생인 의안대군 ‘이화’은 어명 없이 궁으로 들어가려고 했고, 원리원칙을 고수하던 중랑장 박자청에 의해 제지당하게 되었다. 의안대군은 후일 태종인 ‘이방원’에게 ‘정몽주’의 척살을 종용한 인물로 조선의 개국 공신인 그를 막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난 의안대군은 박자청의 얼굴에 상처까지 입힐 정도로 심한 매질을 가했지만 왕의 종친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인지 융통성이 없는 것인지 박자청은 물러나지 않았다. 의안대군은 태조에게 건방진 중랑장을 벌할 것을 부탁했으나, 태조는 도리어 종친을 나무라고 올곧게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던 박자청에게 은대를 하사하여 내상직에 임명하여 유막을 지키게 한다. 이때, 주야를 가리지 않고 성실하게 근무한 그의 태도에 왕은 매우 흡족해했다고 전한다.

고려 말 왕실의 주요 토목사업을 책임졌던 환관 ‘김사행’을 따르며 토목 관련지식을 배웠던 박자청은 하급무관에서 내관으로 임명되자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태조 3년부터 공역을 시작한 박자청은 여러 건축물의 보수 공사를 맡아 완벽히 수행해낸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태종은 제릉과 건원릉 공사 감독, 한양 도성의 구축, 청계천 조성, 창덕궁과 성균관 문묘, 경회루 건설 등을 맡기는데, 특히 성균관 문묘는 4개월, 경회루는 8개월 만에 완공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만큼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경회루는 박자청의 놀라운 건축가로서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연못 전체를 순환하도록 되어 있고, 연못의 바닥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늘 연못이 맑고 잔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경회루의 연못에 물이 가득 차지 않자, 박자청은 물을 모두 빼 물이 스미는 곳을 검은 진흙으로 메꾸어 물이 고이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이뿐만 아니라, 후일 정조가 화성 행차를 위해 한강에 배다리, 즉 부교를 설치할 수 있었던 묘안은 원경왕후의 국장 행렬을 위해 박자청이 마전 나루터에 부교를 설치한 사례를 본뜬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적122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박자청이 건축했다. 출처
: 네이버포토

사람이란 절대 완벽할 수는 없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성실한 그였지만 원리원칙만을 중시하고 여유 없는 성격으로 인해 주변의 미움을 받게 된다. 게다가 천출인 그가 타고난 재능과 성실함으로 왕의 눈에 들어 벼락승진을 하게 되자,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살아생전 양반 사대부들은 박자청이 노비 출신이므로 부당한 비난을 가했고 심지어 그가 세종 5년에 사망하자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조차 망자를 두고 치졸하기 그지없는 문구를 남기는데, “박자청은 덕이 없고 각박한 인성을 가졌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고 했다”라고 적었다. 후일 세종이 등용한 천출이었던 장영실을 두고 온갖 시기 어린 비판을 가한 관리들의 행태를 볼 때, 박자청의 성격과 업무 태도의 결함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노비 출신의 그가 토목 관련 재능만으로 왕의 눈에 들고 신임을 얻는 그 자체가 지배계층이었던 양반들에게 못마땅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태종과 세종은 관리들의 온갖 비난으로부터 그를 믿고 보호해주었고 태종은 그를 명나라 사신으로까지 보내기도 한다. 박자청은 자신을 끝까지 지지한 태종이 서거하자 태종의 능인 헌릉을 조성하는데 모든 힘을 쏟는데 이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이러한 박자청의 진심을 알았던지 세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사흘 간 조회를 중지시키고 종이 100권과 손수 지은 제문을 내려 나라에서 장사지내게 하였으며, ‘익위’라는 시호까지 내린다.

건축가로서 뛰어난 자질도 있었지만 뚝심과 강인한 의지로서 자신을 믿어준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한 박자청. 너무 우직하고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자로서의 아쉬운 면도 있으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리 없는 울림을 주는 것은 우보의 길을 가는 것처럼 힘들고도 바른 삶의 방식이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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