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유배지서 탄생한 추사체, ‘추사 김정희’

몇 년 전부터 캘리그라피의 열풍이 대단하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손 글씨보다 키보드에 의해 주로 의사소통을 하는 시대지만 시간이 갈수록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하나의 에술적 장르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뜨거워지고 있는 요즘이다. 각각의 개성이 한껏 묻어난 캘리그라피 작품들을 보면 절로 경외심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훌륭한 캘리그라피나 서예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조선 사대 명필가인 ‘안평대군’, ‘양사언’,‘한석봉’, ‘김정희’가 떠오른다. 특히 이들 중 김정희 선생의 ‘추사체’는 완성도 높은 강렬한 매력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선생의 필생의 업적으로 극찬 받는 ‘추사체’는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내고 천 필의 붓을 버릴 정도의 노력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와 그의 고결한 철학이 깃는 역작이기에 더 숭고한 마음을 갖게 한다.

추사 김정희의 ‘자화상’.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 : 네이버백과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주로 알려진 ‘추사 김정희’ 선생은 시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로 활동한 예술가 일뿐 아니라 금석학과 북학파를 공부한 실학자이자 관료였다. 본관이 경주인 그는 자는 ‘원춘’으로 생전에 백여 개가 넘는 호를 지녔는데 ‘추사’, ‘완당’,‘승설도인’. ‘노과’, ‘천축고’등의 여러 호를 바꿔가며 사용하였다고 한다. 당대 양반가를 대표하는 명문 가문 출신으로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가 총애한 화순옹주와 혼례를 올린 이였다. 김정희는 당시 반가의 관습대로 백부인 김노영의 양자로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왕실의 내척으로 태어난 김정희의 탄생 일화은 신비롭다. 태중에 10달이 아닌 24개월을 채우고 태어났다거나, 그가 태어났을 때 샘이 말라 시들어가던 뒷산 나무들이 다시 솟는 샘물로 인해 되살아났다고 전한다. 이러한 탄생 일화는 특출한 천재성을 타고난 그이기에 그 재능을 극찬하며 구전되어 진 것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제주도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 국보 180호로 지정. 출처=나무위키

비범한 천재의 어린 시절은 역시 남달랐는데, <대동기문>에 의하면 그가 일곱 살 때 ‘번암 채제공’이 길을 가다 대문에 붙인 ‘입춘첩’을 보고 선생의 생부 김노경에게 이 글씨를 쓴 아이가 후일 명필가로 크게 될 것이나 그리 되면 운명이 기구해지므로 대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상사에 통달한 ‘채제공’은 난세에 태어난 뛰어난 예술가의 고된 여정을 이미 예지한 듯하다. 실제 ‘채제공’의 예언대로 김정희 선생은 세도 정치로 문란해진 세상 속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 나가게 된다.

그가 후일 학자로서 기본적인 토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의 월성위궁에서 보낸 덕분이다. 이곳은 영조가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 김한신에게 내린 집으로 이곳에는 ‘매죽헌’이라는 장서가 소장된 큰 서고가 있었다. 어린 김정희 선생은 이 서고에서 많은 서적을 접할 수 있었고 생부인 김노경은 아들을 위해 북학파의 수장인 ‘박제가’ 밑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박제가’ 선생 역시 영특한 제자를 가르치는 보람을 크게 느꼈다고 전한다. 혈육과 첫 아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어두운 십대 시절을 겪은 그는 이십 대가 되자 학자로서의 새로운 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것은 학자로서의 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두 스승과의 만남이었다.

생부인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지금 북경)에 간 김정희 선생은 당대 고증학 최고의 석학인 ‘옹방강’과 ‘완원’이란 두 스승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게 된다. 학문적 방향이 너무도 상이한 두 스승이었지만 그는 지혜롭게 ‘옹방강’과 ‘완원’의 학문관을 모두 받아들여 뒷날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위대한 학문 세계를 구축한다. 훌륭한 제자를 둔 ‘옹방강’ 선생은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김정희 선생을 극찬했고, ‘완원’ 선생은 ‘완당’이라는 아호를 선사한다. 청나라에서 학자로서 운명적 사건을 만난 그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실사구시’에 의거한 학문관을 완성해가고 이는 <금석과안록>이란 역작의 탄생과 함께 무학대사가 세운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재발견하게 되는 역사적인 업적을 낳는다.

간송미술관이 소장 중인 ‘명선’. 출처 : 네이버백과

인생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듯, 김정희 선생의 중년 이후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관료로서는 이미 내리막길이었으나 ‘예술가이자 큰 스승 김정희’의 거대한 삶이 드디어 시작되고 있었다. 삼십 대에 대과에 급제하여 출셋길에 들어섰으나, 생부인 김노경이 정쟁의 희생양이 되어 고금도에 유배되는 것을 시작으로 안동 김씨 세력들이 득세하자 병조참판이었던 선생은 그 사나운 세도정치의 광풍을 피하지 못하고 혹독한 고문과 더불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된다.

가시울타리 속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선생은 편지를 통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후학들에게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중인이든 양반이든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학문의 선각자로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 이 시기에 화가인 소치 허유는 제주도로 세 번이나 건너가 스승의 수발을 들며 성실히 배움의 길을 닦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혼탁한 세상에서 내몰린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열심히 붓을 잡고 그리고 쓰기를 반복한다. 선생의 피나는 노력은 헛되지 않아 후세에 최고의 문인화로 알려진 ‘세한도’와 단순함 속에 맑고 고아하다고 극찬 받는 ‘추사체’를 탄생시킨다. 특히 제자 ‘이상적’을 위해 그린 ‘세한도’는 험난한 세상사를 오롯이 굳은 결기로 버텨내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단련한 세한송백의 기개를 보여주는 역작이다. 유배 중 사랑하던 아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 그는 깊은 슬픔과 고독을 부여안고 예술가로서 고독한 길을 거침없이 걸어간다.

제주도 유배 생활이 끝나 강변에 조용히 살고 있었으나 다시 험난한 세상은 그를 춥고 외로운 북청으로 데리고 가 한 번 더 1년의 힘든 시간을 보내게 한다. 그러나 이미 근 십년 간 세상 풍파를 온 몸으로 버티며 살아온 그에게 이번의 시련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유배 생활이 끝난 선생은 생부의 묘소가 있던 경기도 과천에서 조용히 살다가 71살의 나이로 길고도 거대한 여정을 끝낸다.

시대는 영웅을 낳는다고 하나 모순적이게도 시대는 인물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 예로 조선 선조 시대, 많은 위대한 학자와 인물들이 있었으나 옹줄한 위정자들의 안목과 전쟁의 광풍 속에 역사 속 위인들은 제 빛을 발할 수 없었다. 김정희 선생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가 어지럽힌 세상 속에서 뛰어난 학자, 천재 예술가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나 안정된 시절이었더라면 선생의 업적은 살아생전 더 크게 인정받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김정희 선생이 실로 위대한 것은 오랜 시련 속에서도 그 숭고하고도 강한 결기를 굽히지 않고 오롯이 자신이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특히 선생은 척박한 유배지의 고달픈 생활 속에서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은 ‘추사체’를 굳건한 의지로 완성하였고, 예술적 천재성을 타고난 그가 화법보다는 ‘가슴 속에 만 권의 책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말하며 예술가로서 갖추어야 할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성을 몸소 실천하셨기에 조선 후기 예술사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 본다.

세상은 더욱 빠르게 황폐하게 변해간다. 그러기에 초심을 끝까지 지니며 주어진 여정을 걸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좌절과 변심이란 장애와 유혹 앞에 수없이 쓰러질 때마다 김정희 선생의 힘든 여정을 걸어갈 수 있게 한 그 굳건한 결기를 떠올리며 심산하고 힘든 세상사로 축 쳐진 어깨를 한번 정도 다독여보는 여유를 가져보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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