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기 전인 연말부터 사람들은 습관처럼 내년 운세를 점친다. 어찌 보면 이런 점을 보는 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품은 채,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는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복 행위의 하나라고 볼 수가 있다.
새해 운세를 볼 때, <토정비결>에 근거하여 보게 되는데 재밌게도 이 <토정비결>의 저자가 ‘토정 이지함’ 선생으로 아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토정비결>의 저자가 ‘이지함’ 선생이라는 확실한 근거는 없다. <토정비결>이 유행한 것은 19세기 이후였고 그 전에는 <토정비결>이라는 문헌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토정비결>에 실려 있는 많은 내용은 무수한 세월을 걸쳐 결집하여 19세기에 편찬된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대다수다. 즉, 이지함 선생의 또 다른 이름인 ‘토정’을 그 책에 가탁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기인, 문신으로 알려진 이지함 선생은 고려 충신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형백’, ‘형중’, 호는 ‘수산’, ‘토정’이며, 시호는 ‘문강’이다. 대부분의 삶을 서울 마포 용강동 부근에 흙담으로 된 움막집에서 살아서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고 한다. 일찍이 부모를 여읜 선생은 형인 ‘이지번’에게서 글을 배웠고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경사자전,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에 해박하였다. ‘이지번’의 둘째 아들이자 선생의 조카인 ‘이산해’의 스승이기도 하다. 선생은 조카가 큰 인물이 될 재목임을 예언하였고 선생의 예언대로 ‘이산해’는 북인의 영수로 알려져 있다.
성리학의 국가인 조선에서 이지함 선생은 민생의 행복을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한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사상가였다. ‘사농공상’의 원리가 적용되는 사회에서 그는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 관계를 중요하게 강조하였고 광산 개발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했다고 전한다.
사실 이지함 선생은 평생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한 배경에는 개인적으로 겪은 불행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장인 이정랑이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능치처사되는 비극을 지켜보았고 처가가 역적 집안이 된 이후 주로 마포와 서해안 일대를 떠도는 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사관이었던 친구 안명세가 을사사화의 진상을 직필하여 특정기로 넣어둔 것으로 처형된 사건도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그래서였을까? 이지함 선생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56세 때였고 재야의 선비를 기용하는 정책으로 천거되어 포천 현감이 되었는데 마음을 다해 백성들을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후일 실질적인 식량 부족을 위한 해결책을 상소로 올렸지만 편협한 사고를 지닌 중앙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사직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알아본 조정은 4년 뒤 탐욕을 부렸던 전 현감 대신 선생을 아산 현감으로 임명하였고 선생은 ‘걸인청’을 운영하여 황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구제하는 데 최선을 다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걸인청’을 운영하며 선생은 단순한 구휼이 아니라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가르쳐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백성들의 삶에 개방적인 사고를 고민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이 고된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살았던 마포는 수운 물류의 중심지로 소금과 젓갈이 거래되고 옹기가 생산되는 백성들의 힘든 삶의 현장이었다. 하루하루를 살기 위해 힘겹게 버티는 백성들을 보며 그는 소수의 지배 계층을 위한 융통성 없는 사회질서에 회의를 느끼고 실질적인 구휼정책에 많은 고민을 하여, 그 결과 관료로 재직 중일 때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일 수 있었다. 이러한 민생을 위한 선생의 행적을 보고 조선의 ‘실학’의 뿌리는 이지함 선생에게 있다고 보는 의견이 다분하다. 실학의 기본 정신이 ‘실사구시’인만큼 농업만큼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의식을 자급할 수 있도록 하는 선생의 경제사상은 실학의 기본 정신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신 선생의 그 마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신혼 때 추위로 힘들어하는 거지 아이에게 새 도포를 벗어주고 흉년에 구호곡을 마련하기 위해 일부러 큰 장사를 하여 그 이득을 허기진 백성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셨다. 또한 관리로 계실 때 개관사업으로 많은 곡식을 장만하였으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평생 선생 자신은 늘 가난하게 사셨다.
선생의 조카인 ‘이산해’는 <숙부 묘갈명>이라는 책에서 ‘배 타기를 좋아하여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다. 나라 안 산천을 멀다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험하다고 건너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간혹 여러 차례 추위와 더위가 지나도록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도 하였다’고 숙부인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이렇게 선생은 한곳에 머물지 않았고 구속된 삶을 싫어했다.
선생은 이율곡 선생과 조식 선생과도 교우하였는데 조식 선생은 그를 가리켜 ‘도연명’에 비유하였고 이율곡 선생에 의하면 ‘이지함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선생은 기인적인 풍모로 알려져 있다. 혹한에도 홑옷으로 지내며 눈밭에 눕기도 하였고, 열흘이나 절식도 가능하셨는데 보령에서 서울로 갈 때도 한꺼번에 한 말의 밥을 먹고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걸었다고도 한다. 늘 죽장을 짚고 다닌 선생은 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니며 허기가 지면 그 쇠갓을 벗어 밥을 지어 드셨다고 한다. 졸리면 큰길에서 선 채로 주무시며 코고는 소리 또한 요란해서 소와 말이 피해 다녔다고 전한다.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으나 사람을 사귐에 귀천을 두지 않아 어부를 가장 존경하셨고 가장 아낀 제자는 가장 미천한 신분의 ‘서치무’와 ‘서기’라는 자였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선생의 호를 가탁하게 된 이유는 지금까지 선생의 삶을 보아도 충분하다. 자신은 가난하게 사셨으나 한평생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에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고자 노력하셨으며, 양반 출신 선비의 고고한 모습보다는 파격적이고 기이한 모습들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하셨다. 또한 서경덕 선생의 제자로서 <주역>을 바탕으로 한 상수학을 수학하였다는 사실 또한 점서인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자격 요건이 충분하다고 볼 수가 있다. <토정비결>이 유행한 19세기는 황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은 탐관오리들의 행패가 심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진심으로 민초들을 사랑한 이지함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매우 컸을 것이다. 그리하여 삶에 대한 또 다른 희망으로 <토정비결>이란 책에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 점서의 저자 또한 그들을 진정으로 아낀 이지함 선생만이 자격이 있다고 여겨 <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선생의 이름을 가탁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행정가로서의 청렴한 태도와 최선을 다하는 직업의식은 강조되어 오고 있으나 모범적인 자격을 갖춘 이들을 찾아보기는 드물다. 조선시대든 과학 문명이 발달한 21세기든 사람들의 삶은 늘 고단하고 힘겹기만 하다. 특히나 갈수록 힘들어지는 경기는 서민들의 무거운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있다. 새해가 시작되어 기복만을 바라며 점서로서 <토정비결>을 대할 것이 아니라, 그 책에 담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소박한 마음과 또 민초들을 아낀 이지함 선생의 위대한 삶을 잠시나마 상기해보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