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장한형 기자] 대법원이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는 연령차별에 해당해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대법원은 임금피크제를 실시하고 있는 회사마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연령차별로 인한 무효 여부는 개별적으로 법률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임금피크제란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임금을 정년 전까지 일정 기간 삭감하는 것을 말한다.
이번 판결은 임금피크제에 대한 법적 효력에 대해 최초로 무효로 판결했다는 의미가 있다.
이에 따라, 임금피크제를 적용, 임금을 삭감 당한 경우 대법원 판결일부터 근로기준법상 임금채권의 소멸시효인 3년 이내에 삭감된 임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임금피크제를 권장하는 정부 정책을 비롯해 이를 도입한 기업들의 혼란이 예상된다.
“경영 목적 55세 이상만 임금삭감, 정당화 못해”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5월 26일, 퇴직자 A(76)씨가 자신이 재직했던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정년을 61세로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55세 이상 근로자들의 임금을 감액하는 내용으로 도입된 임금피크제(성과연급제)는 ‘고령자고용법’상 연령차별금지 규정을 위반해 무효”라며 제기한 임금청구소송에 대해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가 피고(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를 목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55세 이상 직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임금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사유로 보기 어렵다”며 목적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 “임금피크제로 인해 원고(퇴직자 A씨)는 임금이 일시에 대폭 하락하는 불이익을 입었음에도 적정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았다”며, “임금피크제를 전후해 원고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의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55세 미만 직원들보다 성과 좋은데도 임금삭감
재판부에 따르면, A씨는 1991년 한국전자기술연구원에 입사해 2014년 명예퇴직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은 노사합의에 따라 2009년 1월 만 55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임금피크제(성과연급제)를 도입했다. A씨는 2011년부터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았다.
A씨는 임금피크제 도입 이후 직급이 2단계, 역량등급이 49단계 강등된 수준의 기본급을 지급받았다. A씨는 2014년 퇴직하면서 “그동안 임금피크제 도입으로 받지 못한 임금 차액을 지급하라”며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을 상대로 임금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A씨의 경우 임금피크제 적용으로 감액된 월 급여 액수가 성과평가 결과 최고 등급일 경우에는 약 93만 원, 최저 등급일 경우에는 약 283만 원에 달했다.
하지만, 피고인 한국전자기술연구원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지 않는 51세 이상~55세 미만 정규직 직원들의 수주 목표 대비 실적 달성률이 55세 이상 정규직 직원들에 비해 떨어지는데도, 오히려 55세 이상 직원들 임금만 감액됐다.
특히, 임금피크제 시행에 따라 55세 이상 근로자들의 업무 내용이 변경되거나, 목표 수준이 낮게 설정돼 업무량이 감소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없었다.
고령자고용법,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차별 금지”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쟁점은 현행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제4조의4 제1항 ‘모집·채용 등에서의 연령차별 금지’ 규정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사업주는 모집·채용은 물론, 교육·훈련, 배치·전보·승진, 퇴직·해고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근로자 또는 근로자가 되려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대법원 재판부는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이 조항은 강행규정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이 조항에서 말하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란 연령에 따라 근로자를 다르게 처우할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 데도 차별한 경우, 달리 처우하더라도 그 방법·정도 등이 적정하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고 판시했다.
앞서 A씨의 경우 업무성과에서 55세 미만 직원들보다 업무성과가 뛰어났고 업무 내용이나 목표량도 변하지 않았는데, 연령이 55세가 넘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았다면 ‘합리적인 이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합리적 이유’ 4가지 기준 제시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로써 임금피크제가 무효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4가지 기준도 명확히 제시했다.
대법원은 “▲임금피크제 도입목적의 타당성 ▲대상 근로자들이 입는 불이익 정도 ▲근무시간 축소 등 임금삭감 대상 조치 도입 여부나 적정성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의 본래 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 4가지 가지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무효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정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 연령 이상 근로자의 임금을 정년 전까지 일정 기간 삭감하는 형태의 임금피크제 효력에 관한 판단기준을 최초로 제시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법 “경영성과 높이려는 임금삭감 안돼”
대법원은 이번 판결 임금피크제는 55세 이상 근로자를 대상으로 임금을 대폭 삭감한 목적이 경영혁신과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도 주목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의 대상이 된 임금피크제의 경우, 피고(한국전자기술연구원)의 인건비 부담 완화 등 경영 제고를 목적으로 도입된 것”이라며, “55세 이상 직원들만 대상으로 한 임금 삭감 조치를 정당화할 만한 이유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이번 판결의 임금피크제로 인해 원고인 A씨는 임금이 일시에 대폭 하락하는 불이익을 입었고, 적정한 조치가 강구되지 않은 점, 임금피크제를 전후해 원고에게 부여된 목표 수준이나 업무의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 등의 사정에 비춰 보면,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불법 여부는 개별 임금피크제마다 판단해야”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모든 임금피크제가 연령차별로 인해 무효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년을 유지하면서 일정 기간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의 효력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기준에 따라 개별 사안별로 달리 판단될 수 있다는 게 대법원 판결이다. 이번 판결이 임금피크제를 적용하는 모든 기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며, 연령차별의 여지가 있다면 개별 사안마다 법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법원은 또, “현재 다른 기업에서 시행 중인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나 소송이 진행 중인 임금피크제의 효력 인정여부는 ▲임금피크제 도입목적의 정당성이나 필요성 ▲실질적 임금삭감의 폭이나 기간 ▲임금 삭감에 준하는 업무량 또는 업무 강도의 조정과 같은 적정한 조치 ▲감액된 재원이 임금피크제 도입목적을 위해 사용됐는지 등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노동계 “환영” vs 재계 “우려”
이번 대법원 판결이 불러올 파장도 만만찮을 전망이다.
우선, 임금피크제 관련 임금 소송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근로기준법상 임금채권의 소멸시효는 3년으로, 현재 임금피크제가 시행 중인 사업체의 근로자들은 이날 이후 소 제기일 기준 3년 전까지의 임금에 대한 청구가 가능하다.
노동계도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국노총은 대법원 판결 직후 “제도가 도입된 지 만 5년을 넘겼지만, 도입 사업장에서 청년 일자리가 느는 효과는 미미했고,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의 임금만 삭감됐다”며, “오늘 판결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반면, 사용자측은 우려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번 판결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키고 고용 불안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며, “향후 관련 재판에서는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자의 고용 안정과 청년들의 일자리 기회 확대 등 임금피크제가 갖는 순기능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신중한 해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고 논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