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노후는 축복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노후는 우울감만 안겨줄 뿐입니다. 2020년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 통계에 따르면 노인 13.5%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한 노후를 준비하지 않으면 우울감이 찾아오기 쉽다. 저마다 방식은 다를 수 있으나, 노후에 할 일을 마련하는 게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북 김천에 거주하는 88세 김정갑 어르신은 보석십자수를 통해 삶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김정갑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경북 김천에 거주하는 김정갑(88)씨 집 거실에는 사방으로 보석이 가득하다. 보석 고양이, 보석 호랑이, 보석 해바라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비밀의 열쇠는 안방. 남자 어르신이 침대 위에 단정히 앉아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낡은 밥상에 놓인 패널 위를 오가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한 손에는 커다란 돋보기, 다른 한 손에는 핀셋이 들려 있다. 인기척에도 어르신은 달싹도 하지 않은 채 집중한다.
“귀가 많이 어두우세요.”
안내하던 며느리 이선희(57) 씨가 설명한다.
연못 가장자리, 며느리가 좋아하는 ‘노랑꽃창포‘ 심고
김정갑 씨는 ‘마을금고 초대이사장‘ ‘통장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꽤 발넓은 사회활동을 해왔다. 꼼꼼하고 정갈한 성품에 어디서나 열심이셨지만, 그는 70세 즈음에 모든 활동을 접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내조해온 아내와의 삶에 집중하고 싶어서였다. 함께 정원을 가꾸며 텃밭을 일구고 근처에 사는 자녀들과의 행복을 꿈꿨다.
“외국 영화에서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잡고 다니시잖아요? 저희 시아버지는 오토바이 뒤에 어머니를 태우고 다니셨어요. 소문난 잉꼬부부셨지요.”
김정갑 씨는 연못을 파내고 돌무더기를 예쁘게 쌓아 잉어를 키웠다. 연못 속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노랑꽃창포를 심고 며느리를 기다렸다. 텃밭에는 상추, 고추를 키워 자녀들이 다녀갈 때마다 한 아름씩 안겼다. 크고 작은 나무들도 예쁘게 전지해 정원수로 가꿨다. 누구보다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날마다 일거리를 만들며 행복해 했다.
“70대를 더없이 알콩달콩 보내셨어요. 그런데 어머니의 체중이 점점 늘고 노환이 오면서 무릎관절과 허리근육이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곁에서 오가며 돌보는 며느리 이선희 씨의 안타까운 시선이다.
우울의 시작, 떨어지는 기력과 고립되는 감정
아내의 나이도 85세로 만만찮다. 더구나 장기요양 3급 진단을 받아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다. 함께 장독대의 항아리들을 닦으며 웃던 때가 까마득히 멀다. 아내의 몸이 불편하니 함께 하던 일을 김정갑 씨 혼자 해낸다. 항아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에 아내는 구경꾼이 됐다. 청소를 하는 것도, 뜰을 가꾸는 것도 텃밭을 가꾸는 것도 혼자다. 둘이 하던 일을 혼자 하려니 정갈한 김정갑 씨도 어쩔 수가 없다.
뜰은 여전했지만 살림은 빛을 잃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픈 다리를 끌고 겨우 식사를 준비하지만 어설프다. 김정갑 씨는 살림은 해본 적이 없어 아내가 실수할 때마다 불안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두텁게 쌓이고, 곁의 친구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의욕상실은 노인성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노인성 우울증은 65세 이상 노인이 앓고 있는 흔한 질환이다. 원인은 노화에 따른 신체적 질병과 기능 상실로 인한 심리적 고통이다. 그에 따른 고독감, 외로움, 소외감, 심리적 불안감, 재정적 어려움으로 나타난다. 80% 완치될 수 있으며, 가족의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
가족의 관심, 살아있고 사랑받는 느낌 주는 것
김정갑 씨의 우울감은 점점 더 깊어갔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벌컥 화를 내기도 했다. 말하기도 싫고, 자녀들의 걱정스런 말도 잔소리처럼 들렸다. 그 즈음 둘째 며느리 이선희 씨가 컬러링 북을 내밀었다.
“아버님, 학창시절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셨다면서요? 색칠부터 다시 시작해 보시면 어떨까요?”
처음에는 부질없는 짓이라며 책을 밀어냈다. 무료한 시간이 이어지자, 김정갑씨는 슬그머니 컬러링 북을 꺼냈다. 꼼꼼히 색칠하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다. 밑그림 위에 알록달록 색을 입히자 보기도 좋다. 어느새 완성된 컬러링 북이 쌓이고, 이번엔 직접 그려보고 싶었다. 며느리에게 스케치북을 부탁해 호랑이도 그리고, 꽃도 그렸다. 가족들의 칭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움직임이 불편한 아내 곁에서 뭔가를 할 수 있으니 더 좋았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었다. 그림이 작품이 돼 선물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날 아버님 댁에 가보니 스케치북을 다 치워 버리셨더라고요. 그리는 것에 흥미를 잃었고 부질없는 짓이라며 다시 우울해 하셨어요. 그래서 이번엔 주변의 권유로 보석십자수를 사다드렸어요.”
10분 거리에 사는 며느리 이선희 씨는 남편과 함께 직장생활 틈틈이 시댁을 살핀다. 주말마다 시댁에 들러 염색, 이발, 목욕도 해준다. 돌아올 때면 두 분을 꼭 안아주며 스킨십을 한다. 그동안 받은 은혜도 컸지만, 살아있다는 느낌과 사랑받는 느낌은 동일하다 생각해서다.
보석십자수, 명상하듯 한 작품씩 삶의 활력과 기쁨 누려
보석십자수 재료를 접한 김정갑씨는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커다란 밑그림에 좁쌀만 한 구슬로 채워야 하는 작업이 까마득해 보였다. 재료는 한쪽 구석에 방치됐다. 다시 재료를 꺼낸 것은 오롯이 며느리의 권유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가보니 아버님이 돋보기를 끼시고 작업을 하는 거예요. 얼마나 반갑던지 꼭 안아드렸어요.”
보석십자수는 꼼꼼하고 성실한 김정갑 씨에게 안성맞춤이다. 밑그림에 적힌 번호의 보석을 골라, 콕 찍어 맞추는 작업이다. 좁쌀 같은 보석이 밑그림에 다 채워져야 그림이 완성된다. 엄청난 집중력과 끈기, 시간이 필요하다. 몰두할수록 잡념은 사라지고, 명상하듯 차분해진다.
“딱 맞는 일을 찾으신 것 같아요. 엄청 재미있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하세요. 이렇게 큰 걸 일주일에 한 작품씩 하신다니까요.”
김정갑 씨는 재료를 사다주는 며느리 경제 사정에 미안하다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덕분에 작품이 하나둘 거실에 걸리기 시작했다. 자녀들은 용돈 대신 작품을 샀다. 명절에 친척들이 와서 감탄하면 하나씩 선물도 한다.
며느리 이선희 씨, 구순 기념 전시회를 계획
“시작한 지 벌써 3년째예요. 요즘엔 저희들에게 작품 판돈으로 맛있는 것도 사주세요.”
구순 때, 아버님 작품 전시회를 여는 게 목표라는 며느리 이선희 씨는 잘 가꿔진 뜰이 전시회장이 될 거라 말한다.
김정갑 씨는 여전히 아내의 수발을 든다. 밥도 먹여주고 세수도 시켜준다. 어설프게 부엌일도 하지만, 자꾸 웃음이 샌다.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것,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다. 하루가 풍요롭게 느껴지니 감사가 절로 나온다.
오늘도 김정갑씨의 작업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어느새 반짝반짝 예쁜 강아지 두 마리가 태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