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황복실 기자] 옛날을 그리워하는 인생과 옛말을 하는 인생이 있다면, 이음전(66) 씨는 현재의 시간을 보내면서 풍성한 옛말을 저장한 인생이다.
나란히 자리 잡은 항아리들이 유난히 반짝이던 날, 장독대 앞에 이음전씨와 마주 앉았다. 잘 익은 된장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그가 입을 뗀다.
“나는 이 항아리들만 보면 내 가슴이 마구 뛰면서 살아있음을 느껴요. 항아리를 닦으며 얘들에게 당부하지요. 얘들아, 예쁜 곰팡이 꽃만 피워야 해! 얘들아, 어느 집 식탁에 찾아갈 거니? 하면서요.”
무표정으로 있어도 하회탈처럼 웃는 인상에 콸콸 웃음을 더하니 보기만 해도 순수함이 묻어난다.
소박한 산골 신혼살림, 고비의 연속
그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축산업을 하는 남편의 직업에 매료돼 목장경영을 꿈꾸며 문경에서의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의 신혼살림은 얼마 안 가서 민낯을 드러냈다. 신혼 초부터 어렵사리 키운 소 값이 폭락하고, 폭락한 소 값은 회복되지 않아 아무리 노력해도 일어서기 힘들었다.
하는 수없이 축산업을 접고 밭농사로 눈을 돌려 배추를 심었지만 농기계 없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더구나 빌린 땅에 애써 지은 배추농사가 배추값 폭락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몇 번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인생전환점, ‘편지쓰기’ 응모
육체적으로 힘이 들수록 정신은 말개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아이는 커가고 힘든 마음을 조각조각 기록하며 살아 낼 즈음, 우체국에서 ‘편지 쓰기‘ 공모를 한다는 소식지를 보게 됐다. 소식지를 움켜쥐고는 그때의 절박한 심정을 ‘조상님께‘란 제목을 붙였다. 현재 상황을 제발 도와 달라는 절박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글도 매끄럽지 못했을 텐데 그때의 심정이 오롯이 느껴졌나 봐요.”
편지글이 입상하면서 전국에 배포된 ‘편지마을‘이란 문학 모임과 자연스레 교류하게 됐다. 산골에 묻혀 살면서 은행이 뭔지, 관공서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전국구의 편지마을 친구들을 만나자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김치 만들어 팔면 어떻겠냐”
글로 모인 친구들이니 몇 번 만나지 않았어도 몇 년을 만난 것처럼 금방 친해져 함께 울고 웃으며 영역을 넓혀갔다. 다른 지방에서 농사를 짓는 친구들과는 더욱 각별해 서로를 향해 아낌없이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그럼에도 걸핏하면 찾아오는 자연재해와 배추값 하락으로 생활은 여전히 어려움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느 날, 낙심하고 있는 그에게 서울에 사는 편지마을 친구가 “배추로 완제품인 김치를 만들어 팔면 어떻겠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처음에는 귓등으로 듣고 흘렸지만 조여 오는 삶이 깊어지자 그 친구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 나는 글을 쓸 때도 원고지에 썼어요. 서울 친구들이 컴퓨터를 이용하는 걸 보면서 너무 신기했지요. 친구들에게 각종 커뮤니티를 소개받기도 했는데 다른 분들이 컴퓨터를 이용해 물건을 판매하는 걸 보면서 김치 판매가 떠오르더라고요.“
컴퓨터 들여놓고 세상과 소통
아이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라도 뭐든 해야 했다. 용기를 내서 컴퓨터를 들여놓고 무료로 컴퓨터를 가르쳐 주는 곳에 등록해 사용법을 익히며 모자란 것은 밤새워 독학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 정도 컴퓨터가 익숙해지자, 카페를 만들어 자신이 쓴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주로 농촌 풍경과 삶을 담은 소박한 글이었지만 솔직 담백하게 공간을 채워 나갔다. 여러 곳의 사이트에도 가입하고 교류하게 되자 친구들이 제법 모여들었다.
그즈음 또 다른 친구가 그의 김치를 맛보며 맛있다고 만들어 팔라고 했다. 두 번째 제의를 받자, 못 팔면 지인들과 나눠 먹을 생각으로 우선 배추 스무 포기로 김치를 만들어 사이트에 조심스레 올렸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빠른 시간에 그 김치가 다 팔린 거예요. 무슨 용기인지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김치 판매는 그렇게 시작됐다.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커뮤니티에 가입해 주변을 살피고, 농작물과 필요한 물건을 물물교환도 하면서 자신을 알리자 주변에서 김치 주문이 속속 들어왔다. 김치에 필요한 고추밭도 늘려 수확하고, 젓갈도 직접 담갔다. 김장철을 준비하는 일손이 점점 바빠지면서 살림도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농한기에는 몇몇 단체가 주관하는 공모전에 농촌 생활을 그린 수필을 내서 상을 받기도 했다. 모든 일 앞에 힘겹게 살았던 인생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우후죽순 김치사업, 된장으로 승부
그렇게 몇 년간 쉴 틈 없이 바쁘게 살 때였다. 주로 김장철에만 출하했던 김치 판매에 제동이 걸렸다. 여기저기 김치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서 위생법 문제가 거론됐다. 판매를 계속하려면 위생법에 맞는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했고, 그에 맞는 규모도 필요했다.
“또 한 번의 좌절을 경험했어요.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기는 싫더라고요. 신뢰를 바탕으로 쌓아 놓은 단골들도 놓칠 수 없었고요.”
한겨울 들판을 바라보며 황량한 자신의 마음을 채우듯 배추밭을 채울 다른 곡식과 농작물을 떠올렸다. 문경은 배추뿐만 아니라 콩 농사를 짓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농약을 쓰지 않고도 농사가 잘되는 이점이 있다.
생각의 끈은 김치 판매 과정과 함께 자연스레 콩으로 만든 완제품 된장으로 이어졌다. 흔한 된장에 변별력을 넣으면 그만의 된장이 만들어질 거라는 생각에 닿았다. 이어 개발한 것이 무농약 ‘구찌뽕’ 된장이었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의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하니, 이번에는 사업자 등록도 하고, 통신판매 등록도 해서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막상 모든 수순에 부딪치자 산 넘어 산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실과 끈기로 도전을 거듭했다.
CEO 겸 수필집 작가로 대변신
“지금도 생각나요. 어릴 적부터 순하다고 할아버지가 이름까지 ‘음전‘으로 지어 주셨어요. 나는 순하게만 살아야 하는 줄 알고 늘 돕는 자 역할만 했거든요. 그런 내가 심사위원들 앞에서 덜덜 떨면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니까요.“
모든 통과의례를 거쳐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품을 상품화할 수 있었다며 또 한 번 콸콸 웃었다. 많은 일을 겪은 터라 몸도 부실하고, 살찌는 게 소원이라는 그의 얼굴빛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색깔로 빛났다.
산골 농부에서 번듯한 CEO로 성공한 계기를 꼬집자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답한다.
“편지글로 시작한 내 글과 문우들 덕분이에요. 편지글이 수필로 발전해 책도 냈는데, 그 속에 내 삶이 고스란히 있어 소비자들이 나를 더 많이 신뢰하더라고요. 문우의 권유를 듣지 않고 산골에 묻혀 농작물 재배만 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요. 농한기에는 각종 강의를 섭렵하면서 문학공부도 많이 했어요. 덕분에 최근에는 수필로 큰 상금도 받았고요.”
이제 칠십을 바라보는 그의 목표는 된장으로 명장이 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삶을 글로 쓴 두 번째 수필집을 내는 것이다. 목표를 위해 죽을 때까지 글을 쓰며 소통하는 한, 자신의 행로는 계속될 거라는 그의 눈은 이미 명장처럼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