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벽의 ‘국정추묘도’ . 출처 : 간송미술관
변상벽의 ‘묘자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바라보며 좋은 해였든 힘든 해였든 각자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하루하루를 보내며 묵은해를 마무리하는 요즘, 새로운 시간을 나름 의미 있게 맞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재미 삼아 새해를 점쳐보기도 하고 좋은 기운을 북돋우는 물건들을 가까이 두기도 하며 새 각오를 다진다.

특히 복을 불러오는 물건이나 그림들을 준비하여 몸에 지니거나 집 안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 ‘길상화’는 행운이나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동물과 식물 같은 자연물을 그려 그것이 의미하는 행운이나 좋은 일들을 염원하도록 하는 그림이다. 복을 의미하는 여러 자연물이 있으나 고양이를 의미하는 한자 ‘묘(猫)’는 70세를 가리키는 중국어 발음 ‘모’와 비슷하여 장수를 뜻한다고 한다. 고양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늘은 고양이와 닭, 특히 고양이를 주제로 한 길상화로 이름을 떨친 조선 후기의 한 예술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변상벽의 ‘국정추묘도’ . 출처 : 간송미술관

올해를 마무리하는 칼럼의 주인공은 ‘김홍도’와 함께 영조의 어진을 그렸던 도화서 화원 ‘변상벽’이다. 본관은 밀양, 자는 ‘완보’, 호는 ‘화재’인 그는 고양이와 닭 그림을 유독 잘 그려 ‘변고양’ 혹은 ‘변계’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인물 초상화를 잘 그리기로 유명한 도화서 화원이었던 변상벽은 ‘김홍도’와 함께 영조의 어진을 그렸는데, 1763년과 1773년 두 차례 영조의 마음에 쏙 드는 어진을 그린 공로로 중인으로서 파격적인 인사인 현감 벼슬직을 얻기도 했다. 세밀한 관찰력과 섬세한 묘사력을 지닌 변상벽은 주로 용안을 그리고 김홍도는 왕의 몸인 용신을 그렸다고 한다. <진휘속고>에 따르면 “화재는 고양이를 잘 그려서 별명이 변고양이였다. 초상화 솜씨가 대단해서 당대의 국수(國手)라고 일컬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는 백을 넘게 헤아린다”라고 쓰여 있다. 또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는 변상벽이 ‘윤급’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화재화정”의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많은 뛰어난 화가들이 고양이를 주제로 영모화를 그렸지만 변상벽의 작품들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묘사와 대상에 대한 남다른 심미안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림 속 주인공들의 심리 상태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감성을 담고 있다. 참새를 쳐다보고 있는 장난기 어린 고양이의 눈빛, 병아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어미 닭의 모성까지 담아낸 변상벽의 작품들은 생기 가득한 걸작들이다.

변상벽의 ‘묘작도’. 출처 : 서울대 박물관

당시 조선은 산수화를 가장 높이 평가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도화서 화원들도 등급이 있었는데 산수 분야가 가장 높고, 그다음이 동물을 그리는 영모, 마지막이 사람을 그리는 초상 분야였다. 도화서에서 산수화를 공부한 변상벽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산수화를 그려내는 이들을 보며 그들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찾기로 결심한다. 고양이를 평소 사랑하고 아꼈던 그는 애묘의 행동양식과 평소 눈여겨본 모습들을 기억하여 자신만의 영모화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변상벽의 개성 강하고 생기 어린 고양이 그림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고, 조선 중후기 왕실을 중심으로 발달한 애묘 문화의 영향으로 그의 작품은 시간이 갈수록 널리 유명해졌다. 남들과 다른 분야를 개척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가기 시작한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영모화 34점 중 고양이 그림이 15점, 닭이 14점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고양이와 닭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변상벽의 ‘자웅장추’. 출처 : 간송미술관

‘정약용’은 변상벽의 닭 그림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여유당전서> 6권에 시를 남기기도 한다. <제변상벽모계영자도>라는 제목의 이 시는 변상벽이 그린 어미 닭과 병아리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쓴 것이다. 시를 읽고 있으면 절로 눈앞에 정감 넘치는 풍경이 펼쳐진다.

“변상벽을 변고양이라고 부르듯이 고양이 그림으로 유명하네. 이번에 다시 닭과 병아리의 그림을 보니 마리마다 살아있는 듯하네. 어미 닭은 괜스레 노해있고 안색이 사나운 표정 목덜미 털 곤두서 고슴도치 닮았고 건드릴까 봐 꼬꼬댁거리네. 방앗간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땅바닥을 후벼 파면서 낟알을 찾아내면 또 쪼는 척하는데 배고픔을 참아내는 어미 마음이야 보이는 것도 없는데 놀라는 푸닥거리 숲 끝에 얼핏 올빼미가 지나가네. 정말로 자애로운 그 모성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 누가 뺏으랴. 옹기종기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들 황갈색 연한 털 주둥이는 이제 여물은 듯 닭 벼슬은 아직도 제 색을 내지 못했고 그중에 두 병아리는 쫓고 쫓기며 황급히도 어디를 가는지 앞선 놈이 주둥이에 물려 있는 것을 뒤선 놈이 따라가서 빼앗으려는구나. 두 놈의 병아리 지렁이를 서로 물고 놓으려 하지 않네. 한 놈은 어미 뒤에서 가려운 곳을 비비고 한 놈은 혼자 떨어져 배추 싹을 쪼고 있네. 형형의 세세 묘사가 핍진하고 도도한 기운이 생동하네. 후문에 듣건대 처음 그릴 때 수탉이 오인할 정도였다네. 역시 그가 고양이를 그렸을 때 쥐들도 마찬가지였을까. 뛰어난 솜씨 그런 경지에 이르니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네. 못된 화가들이 산수를 그리면서 거친 필치만 보여주네.”

틈새 전략의 가장 훌륭한 사례를 보여주는 화재 변상벽의 작품 세계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까지도 감동시키고 있다. 뛰어난 묘사력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많은 이를 설득할 수 있는 감성을 풍부히 담아낸 그의 그림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빛나고 있다. 변상벽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새로운 길을 모색한 현명한 전략도 있지만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가지 않은 여정을 걸어가며 짊어져야 할 고독감과 두려움을 극복한 끈질긴 집념과 강한 의지에 있다고 하겠다.

황금 돼지해라고 불리는 기해년을 맞이하며 변상벽의 묘작도를 감상하며 그 안에 담긴 그의 열정과 추진력을 얻어가고 싶다. 그처럼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뒤로하고 용기 있게 나아간다면 그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기꺼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