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김지유 기자] “아휴, 밖에서 좀 먹고 들어오지. 언제까지….”
주방이 지겨워 나지막이 푸념하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섭섭하고 눈치가 보인다. 드라마와 현실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 핵가족화와 함께 맞이한 고령화로 시니어의 의식주 가운데 ‘식(食)’, 즉 먹는 문제는 새로운 과제로 등장했다.
특히 끼니 해결과 관련해 대한민국 남성 시니어들은 여성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유교적 가부장 문화 탓에 대개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지내오다, 이제는 귀찮은 존재로 치부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
끼니 해결의 어려움을 타개하려고 음식 만들기를 배워 아내로부터 ‘음식독립’과 ‘가족화목’을 동시에 이뤄냈다는 시니어가 있다. ‘백*원의 골목식당’만은 못하지만 온 가족이 감동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자타공인 ‘골방식당’의 주인공, 차돌 같이 단단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외모의 정재현(65) 씨다. 항상 소나무 같이 지혜롭게 머문다는 뜻의 ‘지송(智松)’이란 아호를 쓴다.
Q. 어떤 일을 하며 살아오셨나?
H도로공사에서 오래 근무했다. 당시 통통한 외모 때문에 ‘뽀식이’로 통했다.주로 특수교량 중심의 고속도로 공사를 감독했는데, 고속도로 6개를 준공하고 나니 30년 세월이 지나 있었다. 지지대 없이 공중에서 이어 붙이는 공법(FCM;Free Cantilever Method)을 이용해 지은 국내 최초 특수교량이자 한강의 28번째 다리 강동대교를 지은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책임이 막중한 업무다. 이런 일을 오래 했으니 성격이 꼼꼼할 듯하다.
상당히 꼼꼼한 성격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 제 신세를 볶는 편이다. 은퇴한 이후에도 늘어지게 자거나 누워 본 적이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많이 걷고 쉴 새 없이 돌아다닌다. 가끔은 느슨하게 살고 싶지만, 30년 동안 꾸준히 새벽 수영을 하며 형성된 습관 때문인지 새벽이면 눈을 뜬다.
Q. 음식 만들기를 배우게 된 계기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지방에서 홀로 지낸 기간이 꽤 된다.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라 주말에 아내가 싸준 반찬을 들고 와 일주일을 나고, 필요한 경우만 사 먹었다. 불안정한 식생활이 건강을 해친다고 느껴 ‘정상적인’ 집밥을 만들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갖게 됐다.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도 없고 주변의 시선도 따갑게 느껴져 미뤘다. 음식 만들기를 배운 것은 2015년경이다.
갓 퇴직해 코이카 해외봉사단 활동을 준비하다 그만 실현하지 못했다. 나중에 외국 나갈 것을 대비해 음식 만들기를 배우기로 했다. 분당에 있는 양식 조리원에 등록했다. 40~50대 여성 24명에 남자는 딱 2명뿐이어서 몹시 민망했다. 강사가 주방 초보자는 양식보다 한식부터 배워야 한다고 했다. 조리 기본기가 없으면 고생한다는 것. 실제로 워낙 기초가 없다 보니 오믈렛 등 간단한 음식을 만들 때도 남들은 지지고 볶는데 혼자만 재료 갖고 끙끙 씨름했다.
어렵사리 3개월 과정을 마친 뒤 강사 조언대로 기본부터 다시 제대로 익히기로 했다. 강남의 한 요리학교 6개월 과정을 등록했다. 기본 양념장 만들기, 밥을 맛있게 짓는 법, 미역국 맛나게 끓이기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실질적 식생활 중심 음식 만들기를 배웠다. 당시 참 많이 배웠다. 썰기, 깎기 등 갖은 고급 기술도 착실히 다 익혔다.
Q. 음식 만들기를 배우고 달라진 점이 있나?
무엇보다 아내로부터 독립했다는 점이다. 아내를 귀찮게 하지 않고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만들어 먹을 수 있으니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되고 당당하다.
가족의 행복지수도 올라갔다.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한 아내를 위해 날마다 아침식사 준비를 맡아서 한다. 아내가 무척 좋아한다.
생일이라든지 특별한 날에는 이탈리아 음식 같은 특별한 요리를 한다. 아들딸도 좋아한다. 딸도 다양한 소스에 관심이 많아 함께 연구하곤 한다. 한강변에 와인 한 병 싸 들고 강아지 데리고 바람 쐬러 나가 준비한 음식을 즐기기도 한다. 환갑 때 애들이 만들어온 현수막 걸고 집에서 파티를 한 게 제일 기억이 남고 좋았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Q. 스스로의 실력을 평가한다면?
웬만한 주부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레스토랑 쉐프 만큼은 요리하지 않을까(웃음). 음식 만들 때만큼은 아내와 주방을 공유하지 않는다. 협업은 없다. 서로의 스타일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 모은 다양한 식기로 플레이팅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꽃장식과 함께 차려 놓은 음식은 눈으로, 분위기로, 입으로 세 번에 걸쳐 먹는 셈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러 다니는데, 주변에 나처럼 음식을 만들 줄 아는 남성 시니어는 드물다. 아직 남자가 부엌 드나드는 것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가족에게는 마음껏 대접하지만 지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며 자랑하는 일은 피한다. 그러니 결국 ‘골방식당’일 수밖에 없다.
Q. 잘 만드는 음식은?
먹어 본 음식은 다 흉내 낼 수 있다. 늘 분석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자주 만드는 음식은 시금치 ‘프리타타’와 ‘감바스’다.
프리타타는 올리브유 두르고 채소 볶다가 시금치 넣고 달걀 풀고, 버터와 향신료를 넣어 자작하게 끓인 뒤 간 치즈를 뿌리고 오븐에 굽는 음식이다. 농도 조절이 관건인데, 지금은 ‘달인급’이다.
감바스는 올리브유에 마늘편 볶다가 새우 넣고 후춧가루 뿌려 볶은 뒤 바게트 빵에 찍어먹는 음식이다. 밀키트도 팔지만 직접 만든 것이 훨씬 맛있다. 김치는 담가 본 적 없지만, 김장은 열심히 돕는다. 단, 군대에서 먹었던 양배추 김치만은 맛있게 잘 담근다.
Q. 음식 독립이 가져다 준 비전은?
꼭 ‘독립’ 때문은 아니지만, 생활에 여유와 멋이 생겼다. 공대 출신이어서 논리적 구조화에만 익숙한 사람이라 노년기에는 감성을 풍부하게 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늘리고 싶었다. 음식 만들기의 섬세한 과정이 큰 몫 한다. 현재는 다양한 사람들과 궁궐 나들이하기, 연필화 그리기를 비롯해 소소한 놀이들에 빠져들고 있다. 자전거를 탄 지 16년쯤 됐는데, 혼자 다니는 맛을 알게 돼 조금씩 국토 종주를 하고 있다.
아내가 속한 라이온스클럽의 봉사활동을 돕기도 한다. 송파구에서 중식당 하는 분이 월 1회 탕수육과 짜장면으로 경로당 어르신들을 대접한다. 직접 가서 도와 보니 짜장 붓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그 정도 내공은 없으니까 아직은 정기적으로 봉사하지 못하고 마음만 갖고 있다.
Q. 남성 전용 요리학교가 많은데, 역차별이란 지적도 있다.
요즘은 이전과 달리 사설학원뿐만 아니라 공공기관이 마련하는 ‘남성 시니어 집밥 만들기 강좌’ 등도 많다. 미디어에서 남성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남성 전용 학원에서 배우든, 일반 학원에서 배우든, TV를 보며 배우든, 음식을 만들 줄 알면 노년기를 살아가는 데 유리하다.
Q. ‘음식독립’을 갈망하는 시니어들에게 조언한다면?
체면도 중요하지만, 당장 나 자신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공자님도 시류를 따르라고 했다. 눈치 보거나 핑계 대지 말고 도전해 봐라. 부끄러움은 잠시다. 음식 만들 줄 알면 인생이 달라진다. 못 배우면 계속 아내만 쳐다보며 ‘삼식이’ 소리를 듣게 된다. 한가지 팁이라면, 한식 기초부터 탄탄하게 익히라는 것!
아내들은 비아냥거리거나 핀잔하지 말고 남편의 실수를 너그러이 봐줘야 한다. 그래야 남편이 덜 주눅 들고 학원에 갈 용기가 생긴다.
고교동창 4명이 아빠요리학교에 함께 참여했더라. 이들은 술집을 전전하며 정치공방을 벌이는 대신, 학원 공유주방에서 매월 한 번씩 만난다고 했다. 함께 4인분 음식을 만들어 와인 한 병 따놓고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참 보기 좋았다.
더 많은 남성들이 음식 만들기에 도전하기 바란다. 생명의 근본 활동인 ‘먹기’가 맘 편하게, 몸에 좋게 이뤄져야 비로소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시대가 변했다고 개탄만 하면 뭐하는가. 수염은 그만 쓰다듬고, ‘삼식이’ 신세 벗어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