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정해진 시기가 있다고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한 시니어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배움을 향한 갈증은 나이를 뛰어넘는다. 자식 같은 20대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늦깍이 시니어들을 대학 캠퍼스에서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 관악구 인헌시장에서 만난 정은경 씨(57)는 지난 3월부터 ‘인헌시장 특성화 첫걸음시장 육성사업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43세에 한양사이버대학에 입학하면서 학업을 다시 시작했고 전통시장 활성화를 돕는 전문가로 성장했다. 50대 나이에 일자리를 새로 얻기도 힘든데, 전문직에서 일하기까지의 스토리가 너무 궁금하다.
육아 부담 덜면서 보석감정사 자격 취득
그는 서울에서 여고 졸업 후 취직했다. 가정형편이 넉넉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에서 5년간 기획관리부와 자료실에서 근무하다가 결혼 후 임신하면서 퇴사했다. 당시는 결혼하면 직장을 다니기 힘든 시절이었다. 맏며느리, 아내, 엄마로서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연년생 두 딸이 종일반 유치원에 다니게 되면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내 시간이 생기니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어요.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보석감정사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1996년 보석감정사 자격증을 취득했죠. 남들이 잘 하지 않는 좀 특별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 후 보석 상점을 운영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주얼리평가협회 이사(2009~2016)로 활동하면서 해외 보석전시회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어요. 덕분에 일본, 중국 시장을 경험하면서 국제 감각을 익혔죠.”
두 번의 사업 실패, 경영 전문성 부족 절감
1998년, 스포츠 장비를 수입하여 판매하는 남편이 쇼룸이 필요하다며 200평 규모의 휘트니스클럽을 오픈했다. 셋째인 아들이 아직 어렸지만 직원과 고객 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아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 과잉 투자를 하여 8년 만에 문을 닫았다. 사업가로서 갖추어야 할 마인드와 전문 지식 없이 고객 만족에만 집중한 것이 화근이었다.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고 싶어 바로 피부미용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화여대 부근에서 여성 전용 토탈 케어 시스템을 제공하는 ‘더바디세이프’를 오픈했지만 운영란을 겪으면서 3년 만에 사업을 접었다.
“사업에 계속 실패하면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었어요.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마음만 앞섰고 전문적인 경영 노하우는 없었어요. 남편 사업도 출렁거리면서 수입이 일정치 않았죠. 고등학생 딸 둘과 초등학생 아들을 키우고 있었는데 경제적 압박이 컸고 답답했어요”
전문적인 경영학 공부 시작
대학 공부를 시작하기에 늦은 감은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2008년 한양사이버대학 실버산업학과(추후 시니어비즈니스학과로 개명)에 입학했고,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다.
“큰아이가 미대를 준비할 때고 아이들 학원비도 만만치 않아 사이버대학을 알아보았어요. 이때 제 눈을 사로잡은 학과가 있었죠. 새로 개설된 실버산업학과인데, 다른 학과와 차별화된 뭔가가 있을 것 같아 지원했어요”
그는 늦게 시작했지만, 누구보다도 진지하고 성실하게 공부를 하여 장학금을 받았고 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공부의 참맛을 알게 되면서 시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했고, 연이어 호서대학교 벤처대학원에 입학하여 벤처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나이가 53세였다.
“제가 공부할 때 남편만 빼고 모두 학생이라 학비 조달이 큰 문제였어요. 시립대 경영대학원과 서울 캠퍼스가 있는 호서대 벤처대학원을 선택했지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야 했지요. 지난 4월에 모두 갚아 이젠 홀가분합니다.”
전통시장과의 인연에서 새로운 길 만나
2018년 박사학위 취득 후 ‘한국비즈컨설팅’ 이사로 활동하면서 마장동축산물시장 협동조합 육성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전통시장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소상공인진흥공단에서 주관하는 상권육성전문가 양성 교육과정을 알게 됐다.
“이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지원하는 특성화시장 사업단장 신청 자격을 얻게 돼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재차 도전하여 자격을 취득했죠. 10여 년 동안 꾸준히 공부한 노력이 열매를 맺는 뜻깊은 순간이었어요”
전통시장 살려내 대통령상 수상 견인차 역할
2019년 주문진건어물시장 특성화첫걸음시장 사업단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가정을 꾸린 후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주문진에서 혼자 살게 되었지만,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갔다.
지방에 있는 전통시장의 특성상 상인들의 연령대가 높아 간편결재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이에 매월 이벤트를 통해 신용카드, 모바일, 제로페이 등의 간편결재를 홍보하고 사용을 권장했다. 늘어난 1인 가구를 위해 건어물을 소포장으로 제작하여 판매하고, 상인들의 소속감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지원했다.
많은 관광객이 모이는 가을에는 어물전 축제와 지역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플리마켓(flea market)을 동시에 진행하여 시장을 찾은 고객들에게 먹거리,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했다. 점점 시장 인지도가 올라갔고 지역 주민과의 협업도 잘 이루어졌다.
마침내 시장 상인회와 한마음으로 노력한 결과 2019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대통령상(단체)을 받았다. 연말 평가를 통해 문화관광형시장으로 도약함으로써 2년간 9억 원 지원도 받게 됐다.
2020년에는 서울 동작구에 있는 남성사계시장으로 자리를 옮겨 2년 동안 문화관관형 육성사업단장으로 활동했다. 국립현충원과 인접해 있어 문화해설사와 함께 하는 ‘단풍 가득 충효길 걷기’ 행사를 기획하여, 충효길 스토리를 들으면서 쓰레기도 줍는 플로깅(plogging)을 병행했다. 이 행사 참여자에게는 온누리상품권을 제공하여 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있도록 지원했는데, 반응이 참 좋았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배달 포장 서비스, 온라인 시장 입점, 다양한 플랫폼을 통한 라이브 커머스도 진행했다.
다양한 계층을 위한 행사도 마련했다. 유치원생과 부모님이 함께 하는 요리교실, 소외계층 어르신을 위한 김장 나눔, 시니어 스마트 쇼핑 체험, 할로윈 이벤트 등을 운영하면서 고객 유치에 힘썼다. 그 결과 2020 전국우수시장박람회에서 국무총리상(단체)을 받았고, 2021년에는 상인회장님이 석탄산업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이런 놀라운 성과의 비결은 뭘까?
“벤처경영 전문성뿐 아니라 해외 전통시장 체험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보석 전시회, 학술제, 남편 해외 출장 등으로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전통시장을 방문했죠. 특화된 시장 운영 방식, 지역 특성을 반영한 이벤트, VMD(Visual Merchandising : 상품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판매장을 매력적으로 관리하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어요. 덕분에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고 벤치마킹할 수 있었어요”
올해 3월부터는 인헌시장에서 특성화 첫걸음시장 육성사업단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중소벤처기업부에 승인을 요청한 상태다.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인헌시장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상인과 고객 모두가 행복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있다.
맡은 사업마다 놀라운 성과를 거둔 정은경 단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침체된 전통시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육성사업단장 일을 당분간 하고 싶어요. 더 나이가 들면 남편과 해외 전통시장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만난 상인들, 상품, 고객들과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에요. 남편은 그림, 저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기대되지 않나요?”
정은경 씨를 보면서 가장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떠올랐다. 배움에 진심이라면 “이 나이에 공부해봤자 나중에 쓸모 있을까?”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어떤 행운의 신이 손을 내밀지 모른다.
“배움을 그만둔 사람은 20세든 80세든 늙은 것이다.
계속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젊다.”
포드(미국 자동차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