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장한형 기자] “기대여명 등 경험적 사실이 현저히 변한 이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반적으로 만 60세를 넘어 가동할 수 있고, 제반 사정들에 비추어 육체노동의 경험칙상 가동연한을 만 65세로 봄이 적정하다.”
2015년 8월, 수영장을 방문했다 사고로 사망한 4살 아이의 가족이 운영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업체는 이 아이가 60세까지 일하는 것을 전제로 손해배상액을 제시했다. 1, 2심 법원도 만 60세가 될 때까지 도시일용노임을 적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가족의 생각은 달랐다.
2019년 2월, 대법원은 역사에 남을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아이가 만 65세까지 일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해 실수입을 계산하라고 판결했다. 1989년부터 30년 동안 60세로 유지된 이른바 ‘육체노동 가동연한’이 65세로 상향된 순간이다.
육체노동 가동연한 65세,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현재 60세인 법적 정년연령도 상향될 수 있다.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정한 정년연령은 현재 만 60세 이상이다. 이 기준이 만 65세 이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둘째, 노인기준연령도 지금보다 높아질 수 있다. 현재 보편적인 노인기준연령으로 통용되는 ‘만 65세 이상’이 ‘만 70세 이상’으로 상향조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70대 이상은 되어야 노인이란 여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셋째, 실제로 70~80대까지 일할 수 있다는 의미다. 현재 실질은퇴연령은 73세, 산술적으로 78세 이상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기대수명과 건강수명 모두 급격히 증가하는 탓이다. 육체노동 가동연한 상향 조정 판결은 앞으로 더 오래 일해야 함을 명시하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쯤에서 의문이 생긴다. 나이 들어서도 꼭 일해야 하는가. 은퇴 후에는 여가를 즐기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우선 의문을 풀어보자.
일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생계를 위한 일, 그리고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다.
생계를 위한 일에는 노동의 대가, 즉 보수가 중요하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교육도 받고 이직도 한다. 회사를 옮기는 일은 다반사. 생계를 위한 일에서의 인간관계는 일이 종료되면 끊어지는 ‘사회적 계약’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일터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면 ‘은퇴’한다. 숨을 ‘은’(隱), 물러날 ‘퇴’(退). 생계를 위한 일은 나이 들면 의미가 없어진다. 서두에서 언급한 일은 생계를 위한 일에
자아실현을 위한 일은 돈보다 자기만족이 중요하다. 자존감을 높이고 사회적 관계를 탄탄하게 한다. 인간으로서,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확신과 삶에 대한 명확한 방향성을 갖게 된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N잡러’(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가 유행이다.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정보 네트워크를 향유하는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처럼 한 가지 직업에 만족하지 않는다. 다양한 일 속에는 자아실현을 위한 일도 끼어 있다. 정작, 자아실현을 위한 일은 시니어들에게 더욱 절실하다. 시니어들도 N잡러가 돼야 한다. 하지만, 시니어들에게 N잡러는 낮설기만 하다.
현재의 50~60대는 ‘산업사회 역군’이란 칭호가 익숙하다. 자긍심의 근원이다. 대학만 나오면 취업했고, 취업 후엔 일만 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상징어가 ‘일·술·잠’이다(한국고용정보원, 2012). 은퇴로 일이 빠지면 술과 잠만 남는다? 천만의 말씀. 생계를 위한 일이 없어졌으니 인간관계도 사라진다. 같이 술 마실 사람이 없어진다. 일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니 잠도 오지 않는다. 실제로 많은 5060세대가 공감하는 이 무시무시한 현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생 100세 시대, 일은 필수불가결의 요소다. 현행법이 규정한 60세에 은퇴해도, 20~30년의 ‘건강한 시간’이 남는다. 다수의 연구결과는 일이 없으면 더 빨리 늙고, 더 빨리 사망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세상 흐름도 그렇다. UN은 2015년 새로운 생애주기를 내놨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 청년, 66~79세 중년, 80~99세 노년, 100세 이후는 장수노인이다.
단언컨대, 시니어들에게는 자아실현을 위한 일이 필요하다.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노후준비가 부실한 탓에 생계를 위한 일에 치여 녹초가 되더라도, 작은 취미라도 자아실현을 위한 일을 병행해야 한다. 서울 탑골공원이나 종묘공원 일대에서 의미 없는 시간을 소진하고 계신 어르신들에게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었다면, 한 사람의 인생, 한 가족의 행복, 한 사회의 발전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어떤 일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행복하다면 바로 그 일이 정답이다.
예를 들어, 매일 골목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치우고 자긍심과 보람을 느껴 행복하다면 담배꽁초 줍는 일을 지속가능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활동반경을 차츰 넓히고, 뜻이 같은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활동할 수도 있다.
둘째, 사회흐름을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세상에서 통용되는 새로운 가치는 무엇인지 공부해야 한다.
70대 유튜버 박막례, 시니어모델 김칠두. 이 분들이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차별화의 가치를 잘 활용했기에 자신의 일을 만들어 주목받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1등이 아니라 차별화된 제품을 강조해 오늘의 애플을 만들었다.
셋째, 지금 당장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연구해야 한다. 나의 경험과 노하우를 다듬어 사람들이 원하는 그 무엇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탐색하면,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창출된다. 수익이 따라온다면 금상첨화다.
바로 ‘창직’이다. 호텔리어, 대리운전기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웨딩카운전 전문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노경환(68)씨, 취미로 텃밭을 가꾸다 도시농업전문가로 활동햐는 오영기(66)씨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