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세의 나이에 40여년을 근무한 학교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삶의 반전을 꾀한 교사가 있습니다. 다소 파격적인 선택입니다. 그것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다’는 목적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황안나 선생은 실제 그런 선택을 했고, 행복하고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맘껏 누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미친 할머니’라고 표현하는 황안나 선생은 ‘나를 위한 노릇’을 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30년 동안 이어진 채무와 가난의 고통을 견뎌냈기에 그의 ‘반란’은 더 없이 소중한 교훈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인생 역정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시니어세대의 내일을 고민해 봅니다.
그는 걷기로 유명인사가 됐다. 2,30대 젊은이였다면 이처럼 유명인사가 되지는 않았을 터, ‘고령에도 불구하고’란 전제가 세간의 관심거리가 됐음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생이니 팔순이다. 2000년 61세 때 처음 도전한 지리산 종주는 횟수가 쌓여 벌써 7번째다. 2003년 64세 때 해남 땅끝마을을 출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2000리가 넘는 국토종단에도 성공했다. 4000km가 넘는 동해-남해-서해 해안도로를 2006년 67세 때, 2012년 73세 때 2번이나 종주했다. 백두대간 종주도 했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홍콩 트레일 등 외국의 유명한 길에도 여지없이 발자국을 남겼다. 58세 이후 그가 걸은 길을 합치면 지구 몇 바퀴를 돌아온 셈이니 사뭇 놀랍고 존경스럽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
“지금은 북한 땅이지만 옛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고, 광복되던 해 부친과 함께 내려왔지요. 철도원이셨던 아버지께서 춘천역장으로 일하실 때 춘천사범에 들어갔고, 1959년도에 졸업했어요. 홍천 서석에서 처음 교편을 잡았고, 그 뒤로 강원도와 인천에서 1998년까지 39년6개월을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자유의 박테리아’가 콧속으로 들어온 겁니다.”
그가 58세 되던 해였다. 교실에 홀로 남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서 ‘나’의 존재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남4녀의 맏이였던 그는 맏딸로, 누나로, 언니로, 아내로, 엄마로, 교사로만 살아 온 자신을 발견했다. 숱하게 ‘누군가를 위한 노릇’을 했지만, 정작 ‘나를 위한 노릇’은 없었던 것. ‘자유의 박테리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를 위한 삶을 살아보자는 고백적 각성이 그 박테리아의 진원지였다.
“올해로 결혼 52주년을 맞았지만, 고행의 연속이었어요. 운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까, 남편이 손대는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어요. 빚더미에 올라앉게 됐지요. 교사시절 월급은 고스란히 빚쟁이들의 손에 들어갔고, 삶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요. 첫아이를 가졌을 때 모락모락 김 오르는 중국음식점 물만두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군침만 삼켰지요.”
자존심이 짓밟히고 뭉개졌다. 중학교 2학년이던 큰 아들이 너무도 간절히 자전거를 갖고 싶어 하기에 절반 값만 대주고 나머지는 아들의 코 묻은 용돈을 보태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줬다. 이듬해 3월, 채권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그 자전거마저 빼앗아갔다. 중3이던 둘째아들은 채권자들이 어머니를 꿇어앉히고 빚 갚을 날짜를 녹음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동인천의 학교까지 18년을 통근하면서 퇴근 후엔 늦은 밤 과외지도로 생활비를 충당하며 독하게 버텨냈다. 하지만, 채권자들이 수업 중인 교실로 벌컥 들이닥쳐 아이들 앞에서 멱살잡이로 끌고 나갈 때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밥 굶어 출근하고, 한 겨울 냉방에서 새우잠은 견뎠어도,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이고 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극단적인 생각을 했지요. 죽기 전에 엄마를 찾아갔어요. 엄마가 위로하셨어요. ‘너는 이제 됐다. 맨바닥까지 떨어졌으니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잃을 것도 없다. 올라갈 일만 남았다.’ 그리곤 강릉 경포대로 갔습니다. 바닷물에 뛰어들 작정이었어요. 겨울바다를 마주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파도가 나를 어루만지며 달래는 듯 했어요. 순간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그래 살아보는 거야’ 다짐했지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죽기야 하겠어.’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마주한 순간, 그는 극적으로 삶을 선택하며 당당하게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30년을 견뎌 빚을 모두 갚았고, 뒤늦게야 남편의 사업도 번창했다. 역경은 그를 강하게 담금질했다. 인생에서 행복과 기쁨은 찰나에 불과하고, 고통과 괴로움이 그보다 훨씬 더 자주, 오랫동안 엄습했으니 견디는 것이 곧 삶이었다. 고통은 삶의 필수요소이고, 시간과 함께 숙성되며, 깊이 있는 삶의 재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은 견디는 것’이란 교훈을 남긴 채 그의 청춘은 소진됐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지만 정년을 8년이나 앞당겨 스스로 사직했지요. 여고시절부터 꿈꿔왔던 글쓰기, 그림 그리기를 즐기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홀가분했지요. 그런데 뜻밖에 건강이 발목을 잡더군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협심증, 고지혈증, 빈혈에다 간에도 이상이 발견됐어요. 의사가 규칙적인 운동을 강권했고, 그 때부터 걷기 시작했지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자택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매일 오르내렸다. 3년을 단련했더니 건강도 좋아졌다. 그 즈음 지리산에 욕심이 났다. 2000년, 61세에 첫 번째 지리산 종주에 성공했고, 이후 지금까지 도보여행을 지속하고 있다.
“비결요? 한 걸음 한 걸음 걸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나도 해봐야지 마음먹고 실천하지 못하는 후배들께는 저만의 비법을 알려드려야겠네요. 그 비법, 아주 간단해요.”
심오한 대답을 짐작했지만 뜻밖이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라.” 그가 도보여행을 시작한 계기도 우연한 결심에 문을 열고 나오면서 시작됐다.
“2003년 2월이었어요. 봄기운을 느끼기에는 아직 일렀는데, TV에서 남녘에 상륙한 봄소식을 전하고 있었어요. 황토밭에 새파랗게 올라온 양파 싹이며, 꽃봉오리가 막 피어나는 동백꽃을 화면으로 접하니 싱그러운 남녘 들판을 걷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산악회의 광주 무등산 등반 일정이 있었고, 이때다 싶어 산행을 끝내고 혼자 해남을 찾아갔지요.”
“길이 길을 가르쳐 준다.” 그가 길을 걷는 이유다. 아무리 복잡하고 괴로운 일을 마주하더라도 길을 걷다보면 해결의 실마리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는 바쁜 일상에 치여 생각의 너비와 깊이가 짧은 현대인들에게 걷기를 권한다.
시간만 나면 도보여행을 자청하면서 인터넷 블로그(blog.naver.com/ropa420)에 단상을 옮겼다. 생각하고 걷고, 걸으며 생각한 마음의 정수(精髓)들이 차곡차곡 쌓이니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연락이 왔다. 그의 첫 번째 저서 ‘내 나이가 어때서’는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란 부제를 달고 2005년 출간됐다.
“여고시절, 서점에 갈 때마다 서가에 꽂힌 내 책을 꿈꾸곤 했지요. 그런데 65세 할머니가 돼서 그 꿈을 이룬 거예요! 책이 나온 뒤 대형서점을 찾아갔어요. 매대에 쌓여 있는 내 책을 보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과 행복감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나를 위한 노릇’을 한 날로 기억한다. 이후 ‘안나의 즐거운 인생 비법’(2008, 샨티), ‘엄마 나 또 올게’(2011, 조화로운삶) 등 2권의 책을 더 냈고, 현재 또 한 권의 책을 집필 중이다.
“무엇이든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진리를 깨달았어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간절히 원했는지 돌이켜봐야지요. 해안일주는 하루 40km씩 4개월 이상 걸리는 ‘끔찍한’ 여정입니다. 무섭고 힘들지만 중간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에요.”
무엇이든 하고 싶은 일은 주저하지 않는다. 한 신문사가 주최하는 교육프로그램에서는 20대 대학생과 짝꿍이 돼 20시간의 강의를 들었다.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을 수강했다. 스마트폰에 있어서는 젊은이들 저리가라는 ‘얼리버드’다. 또, 독서광이어서 문학, 인문, 철학, 종교 가리지 않고 한 달 10권 이상의 책을 읽는다. 한 온라인서점에서는 최고등급 회원이다. 요즘은 등산을 대신해 매일 오전 6시 30분 피트니스클럽에서 운동한다. 벌써 13년째다. 강연과 방송출연, 이러저러한 바쁜 스케줄로 “아플 새도 없다.” 그러니 은퇴 후 할 일을 찾지 못하는 후배들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요리사가 신선한 재료를 듬뿍 쌓아 놓고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해하시겠어요. 너무 오랫동안 집과 직장 루트에 얽매여 그렇겠지요. 너무 오래 새장에 갇혀 있던 새는 문을 열어도 날아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간절히 원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그 동안 못했던 일을 하나둘 접하다보면 언젠가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찾게 될 겁니다.”
10년만 젊었으면 아프리카 오지를 찾아 5년쯤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다. 버킷리스트에서 끝까지 지우지 못할 꿈이란다. 그의 뜨거운 열정에 찬사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