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은 화가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깊숙한 내면까지 살펴 자신의 외모뿐 아니라 영혼까지 그려내는 심오한 작업이다. ‘렘브란트’, ‘들라크르와’, ‘고흐’ 등 서양에서는 화가의 자화상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시대까지 화가의 자화상이 딱 한 점 빼놓고는 없다고 한다. 그 작품은 바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로 불리며 남종화풍의 절대적인 선구자로 활동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얼굴만 그려진 강렬한 인상과 긴 수염을 지닌 사내의 그림을 누구나 한번 쯤은 보았을 것이다. 당대의 자화상을 그리는 기법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법으로 화가의 정신세계까지 오롯이 담아내어 전신사조를 잘 구현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관은 ‘해남’, 자는 ‘효언’, 호는 ‘공재’인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이다. 그의 장남인 ‘윤덕희’와 손자 ‘윤용’도 화업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로서 활동하였다. 경제, 병법, 천문, 지리, 산학, 의학, 음악 등 여러 방면에 박학다식했으며 실학에 많은 관심을 가진 그는 여러 중국 서적을 읽으며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였고, 예리한 관찰력과 사실적 묘사로 산수, 인물, 풍속 등 다양한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특히, 말과 인물화에 뛰어났다고 한다. 말을 즐겨 그릴 정도로 사랑했던 그는 평생 말을 타지도 않았다.
부유한 집 안에서 자라나 증조부인 윤선도와 지봉유설로 유명한 실학자 ‘이수광’의 영향으로 학문적으로 단단한 기반을 가진 그는 숙종 19년인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입신양명하는 꽃길을 걷지 못한다. 증조부인 윤선도가 남인으로서 서인과 극렬히 대립함으로 인해 서인과의 당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그 혼란 속에서 셋째 형인 ‘윤종서’가 귀양 중 죽고, 형 ‘윤창서’와 함께 윤두서 또한 모함을 받아 힘든 고비를 넘기게 된다.
결국 그는 당쟁의 희생양으로 고통을 당하다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귀향하여 작품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자화상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지식인으로서의 분노와 슬픔이 녹아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공부한 선비로서 참된 길을 가기 위한 신념에 찬 강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자화상은 그가 46세에 그린 것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왔을 무렵이니 친한 벗까지 당쟁으로 인해 죽게 되자 청운의 뜻을 접어야 했던 분개와 허무함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고향인 해남 연동으로 돌아온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남은 기간을 학문과 시서화에 전념하며 보내다가 4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과학적 학문관을 지닌 실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최초의 자화상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노동화를 그렸으며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노동하는 농민을 주제로 하는 <선차도>, <돌깨기>, <채애도> 등의 풍속화를 남겼는데 이는 김홍도, 신윤복에 의해 성행한 18세기의 풍속화로서의 과도기적 면모를 보여주는 경향으로 본다. 당시 인물화는 주로 역사나 설화에서 유래한 고사인물화가 주된 흐름이었는데, 이러한 화풍을 자화상과 함께 과감히 깨버린 윤두서였다. 또한, 풍수에 대한 관심으로 회화식 지도인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를 팔도와 작은 섬들까지 표시하여 이전의 지도에서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제작하였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보다 땀 흘려 힘들게 일하는 농민들을 화폭에 담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백성을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선우재록사>에서 그는 “옛날 도연명이 아이에게 노비 한 명을 주면서 경계하여 이르기를 이 또한 사람의 자식이니 잘 대우하라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는 이가 많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노비를 재물로만 본다. 얼고 굶주리게 하며, 해치고 상처 내어 살아서는 그 집안을 파괴하고 죽어서는 그 재산을 몰수하는데 이르니 슬프구나. 나는 이러한 까닭에 이 기록을 남겨 잘 대우하라고 하였다. 이로써 스스로 경계하여 반성하고 또한 자손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윤두서는 노비와 농민을 아낀 지식인으로서 직접 몸소 애민정신을 실행한 이다. 그가 그린 노동하는 농민을 그린 풍속화는 양반들보다 중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인간애가 있고 현실을 직시하는 생생한 그의 작품이 그들에게 강한 설득력과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윤두서가 머물렀던 녹우당 뒤뜰에는 뒤주가 서너 개 있는데 늘 열려있던 그 뒤주에는 춘궁기에 곡식이 채워져 있어 언제든 가난한 이들이 와서 곡식을 나누며 힘든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또한, 해남 백포만 일대에는 윤두서가 개간한 간척지가 남아있는데 그가 배고픈 농민들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학문을 연마한 선비로서 세상에 펼치고자 한 큰 뜻이 있었겠으나, 불운한 시대를 만나 소중한 이들을 잃어버리고 그 꿈을 저버려야 했던 윤두서. 그러나 그는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해 오롯이 살고 자신의 학문과 작품 세계를 위해 자신을 갈고 닦은 진정한 지식인이었다. 일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배움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은 요즘, 배운 자로서의 올바른 삶의 방향과 자세를 보여주는 윤두서야말로 가장 훌륭한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장하는 현대인들이 많다. 그러나 요란한 형식적이고 보여주기식의 배움의 실천과 공유보다 삶의 곳곳에서의 고요하고도 잔잔한 나눔이 더욱 중요하다. 조용하게 흘러든 물길이 마른 논밭에서 풍요로운 추수를 이끌어내듯 공재 윤두서의 지식인으로서의 참된 실천은 삼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