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묵히 나라 지킨 노비출신 무관, ‘충무공 정충신’

숨겨진 영웅들과 뛰어난 인물들이 사후나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제대로 평가받을 때마다 사람들은 “대체 왜 이런 재주나 능력을 갖춘 이들이 이제야 알려지는 것인가”라고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그만큼 적시에 한 인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기란 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충신 장군 영정.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늘 소개할 인물 또한 어찌 보면 역사란 거대한 터널을 거치며 업적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 숨겨진 위인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충무공’이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을 떠올리는데, 충무공이란 무장으로 진충보국했다는 의미의 시호로 우리 역사상 이 시호를 하사받으신 위인들이 12분이나 계신다. 이순신 장군 외에 고려 충신 ‘지용수’, 조선 태종의 심복 ‘조영무’, 안타깝게 모함을 받아 목숨을 잃은 ‘남이’, 임진왜란 때 장렬하게 전사한 ‘김시민’, 왜란과 호란에 이어 이괄의 난을 진압한 ‘정충신’ 등이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이 12분 중 노비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훌륭한 인품과 뛰어난 지략을 지닌 무관으로서 변방에서 성실히 근무하며 첩보와 외교 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금남군 ‘정충신’이다. 광주광역시의 유명한‘금남로’는 이분의 군호를 따서 지은 거리명이다. 권율의 사위이자 이항복의 아래 동서이기도 한 정충신은 본관은 ‘광주’, 자는 ‘가행’, 호는 ‘만운’으로 고려시대 경열공 ‘정지’의 9대손인 광주 향청의 좌수 (혹은 관아의 아전이라고도 전한다)‘정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가 노비였기에 엄격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모계혈통을 따르게 된다.

<계서야담>에 비범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태몽 또한 범상치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정윤이 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자기에게 달려들어 안기는 꿈을 꾸고 놀라서 잠에서 깨었는데, 그 뒤 쉬 잠을 이루지 못하던 정윤은 뜰에서 부엌에서 잠든 식비인 정충신의 어머니를 보고 합환하여 정충신을 잉태했다고 한다. 비록 강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정충신은 어릴 적부터 체구는 작아도 매우 명석하고 당찬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여러 설화와 야담에서 전한다.

어린 나이에 광주 절도영에 들어가 정병이 되어 통인 역할을 한 정충신은 그의 나이 17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 목사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조선팔도가 왜군으로 가득했던 당시, 의주로 피난을 간 선조에게 전라도 전투 상황을 전할 장계를 전해야 했는데 그 누구도 목숨을 걸고 험난한 적진을 뚫고 장계를 전하려는 이가 없었다. 이때, 가장 어린 정충신이 용감하게 자원을 한다. 권율은 말렸지만 씩씩하고 다부진 어린 소년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일찍이 정충신의 총명함을 알아본 권율은 그를 믿고 장계를 맡긴다. 전하는 야사에 의하면 얼굴에 옻칠하여 나환자처럼 변장하고, 장계를 한 줄 한 줄 꼬아 망태기로 만들어 적의 눈을 속일 정도로 영리한 계책을 썼다고 한다. 무사히 의주행재소까지 장계를 가지고 간 어린 소년의 용기에 탄복한 선조는 그를 면천하여 양인이 되도록 하였다. 총명한 그를 눈여겨본 당시 병조판서 이항복은 정충신을 곁에 머무르게 하고 훌륭한 무관으로 키우기로 한다. 이항복은 그에게 무예를 닦게 하고 직접 학문을 가르친다. 스승의 가르침과 본인의 노력으로 그해 행재소에서 실시된 무과에 급제한 정충신은 본격적으로 무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는 정충신 묘.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는 ‘정충신 사당'(그림출처 다음백과).
정충신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험난한 변방에서의 눈부신 첩보 활동을 보여 주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임진왜란 때 적진을 드나들며 왜군과 명나라 사신들의 상황을 꼼꼼히 탐색하여 보고하였고, 광해군 시절에는 국경에서 만포첨사로 근무하며 명과 청으로 건너가 모든 동향을 살폈는데 정충신만큼 변방의 정세에 밝은 이는 없었다고 한다. 면천되었으나 노비 출신이었던 그를 향한 따가운 시선은 여전하여 늘 한직에 머물렀으나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직무에 임했으며,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조선 포로 송환을 위한 사신단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특히, 이괄의 난 때에는 도원수 ‘장만’의 전부대장으로 바람을 이용하여 반군을 크게 물리친 공으로 ‘금남군’에 봉해지게 되고, 정묘호란 때 부원수로 종군하였다. 국경지대를 수비하며 얻은 경험으로 후금과의 단교를 결정하는 조정에 반대하다 유배되기도 한 그는 늘 북방 여진족에 대해 경계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했는데, 정충신의 충고를 새겨듣지 않고 준비하지 않은 조선은 뒷날 병자호란이라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진충사에 보관된 정충신 장군의 갑옷. 병자호란 당시 실제 전투에 착용한 갑옷이다.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리의 높고 낮음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무인으로서 묵묵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그의 일평생은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 간의 도리와 의리를 중시하고 청렴결백하고 검소했던 그의 모습은 역사적 위인으로 존경받을 부분이다. 그의 동서이자 스승이기도 한 이항복이 인목대비의 유폐를 극렬히 반대하여 북청으로 유배를 당하자 정충신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험한 길을 가는 스승을 따른다. 정충신이 쓴 <백사북천일록>에 스승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담겨 있는데, 당시 중풍으로 몸이 성치 못한 이항복이 힘든 유배 길에 오를 때부터 숨질 때까지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무관으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열어준 스승을 모셨으며, 이항복의 유해를 포천으로 모셔 안장했다고 한다. 또한, 장인이자 입신양명에 큰 도움을 준 권율을 극진히 부모처럼 섬겼고 이괄의 난 때 큰 공로를 세웠음에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하는 정충신을 챙겼던 장만을 따라 변방을 지켰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하지만 평화로운 시기에 자리의 높낮이에 연연하지 않고 비록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야말로 위대한 영웅이 아닐까 싶다. 이왕이면 남의 이목을 끌고 조금만 노력해도 큰 대가를 받는 일을 주로 찾는 요즘, 정충신의 우보 같은 진중함을 배워야 할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 정약용이 정충신을 생각하며 쓴 시를 읽으며 속된 마음을 내려놓고 매 순간 충실히 살아냄의 의지를 다져 본다.

“광산부를 지날 때마다 오래도록 정금남을 생각하네. 신분은 비록 구종직처럼 낮았지만 재주는 이순신과 견줄만했네. 옛 사당엔 풍운의 기운 서려 있는데 그의 옛터에서 노인들이 이야기하네. 웅장하여라 서석산(무등산)이여 정기를 모아 뛰어난 사나이를 배출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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