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봄이다. 목을 움츠리게 하고 봄옷에 감히 눈길을 돌리지 못하는 삼월이지만 성실한 자연은 예정된 꽃 전시회를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봄과 겨울이 씨름하는 환절기가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하면 이내 사람들은 활짝 웃으며 자연의 걸작품인 화려한 봄꽃들에 마음을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봄꽃을 생각하면 으레 연상되는 것이 나비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나비가 없는 꽃 그림은 어색할 정도로 꽃의 절친한 지기는 나비라고 할 수 있다. 동서양의 나비에 대한 의미는 문화와 전통에 의해 각기 다르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주로 길상을 의미한다. 특히 나비를 칭하는 한자‘蝶’은 80세 노인을 뜻하기에 부귀와 장수를 염원하며 조선 후기 중인과 서민들이 그림과 가구에 자주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나비는 부부 금실을 상징하고 특히 두 마리의 나비는 사랑을 의미하므로 혼인하는 젊은 부부들이 나비 문양이 그려진 혼수품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기독교가 중심이 된 문화권에서는 나비는 ‘영혼’을, 그리스에서는 ‘불멸’을 의미한다. 다들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 속의 에로스와 프쉬케의 이야기에서 프쉬케는 나비를 의미하며 ‘영혼’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관은 애벌레에서 고치를 뚫고 나와 힘차게 날아오르는 그 아름다운 모습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재밌게도 동유럽권에서는 ‘마녀’를 의미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이렇게 동서양을 불문하고 나비는 대부분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상징으로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데, 특히 조선 후기를 살았던 한 사내의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았으니 그가 바로 조선 오백 년 사를 통틀어 나비 그림의 일인자인 ‘일호 남계우’선생이시다.
본관은 의령, 자는 일소, 호는 일호, 초명은 영시인 남계우 선생은 19세기의 화재가 출중했던 선비 화가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로 유명한 문인이자 숙종 때 소론의 우두머리였던 ‘약천 남구만’의 5대손이자 부사 ‘남진화’의 아들이다. 그는 일평생 나비 그림만을 그려 ‘남호접’ 일명 ‘남나비’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서울의 남촌에 거주하였던 남계우 선생은 명문가 자제이나 당시 소론에게 불리하던 시절 입신양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평생 야인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물론 아버지가 맡았던 종실과 외척에 대한 사무직인 정3품 도정을 역임하고 56세에 감역에 제수, 72세에 종2품 가의대부가 내려졌으나 실직에 나간 것은 아니어서 죽을 때까지 나비 그림에 몰두하며 살았다.
남계우 선생의 작품들은 대다수 나비와 화초를 그린 ‘화접도’이다. 물론 잠자리를 그린 <하화청정도>와 <누각산수도>가 있으나 남계우 하면 나비 그림을 떠올릴 정도로 흔히 말하는 나비 마니아다. 특히 부드럽고 섬세한 필치와 화려한 채색이 특징인데 일반 선비 출신의 화가들이 문인화를 그린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앞서 ‘조희룡’ 선생이 나비 그림을 남겼고 ‘신명연’, ‘이교익’, ‘백은배’, ‘김석희’, ‘서병건’, ‘송수면’등 수많은 이들이 나비 그림을 그렸으나 조선 시대 나비 그림 하면 ‘일호 남계우’를 떠올리는 것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정밀한 묘사와 다양한 나비들을 화폭에 담은 열정과 노력 때문이다.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박사는 남계우 선생이 남긴 작품들을 ‘조선 사람의 곤충학‘으로 극찬하였는데,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에 서식한 37종의 나비들이 암수까지 구별되어 그려져 있고 남방공작나비 등 열대종까지 담겨 있어 당시 우리나라에 서식한 나비종 연구에 도움이 되는 학술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석주명 박사의 평가가 지나치지 않음을 <군접도>의 150마리의 다양한 나비들을 보고 있노라면 잘 알 수 있는데, 깊은 애정과 관찰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창작물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내려오는 일화에 의하면 남계우 선생은 16세에 집 안으로 날아 들어온 나비를 10리나 뒤쫓아 동대문 밖에까지 나가 잡아 가지고 왔으며 잡은 나비를 책갈피로 넣어 두고 그릴 때 꺼내서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는 나비를 유리 위에 올려 그 위에 종이를 덮어 유지탄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채색을 하여 원색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렸다. 이러한 선생의 열정이 깃든 작업 과정으로 인해 나비 종류와 암수, 발생 시기까지 알아볼 수 있어 나비를 연구하는 현대 곤충학자들에게 그의 작품들은 ‘조선의 나비 도감’으로 추앙받고 있다. 즉, 남계우 선생의 작품들은 문화재적 가치와 학술 가치를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남계우 선생이 주로 나비 그림을 그린 이유는 당시 조선 후기 실증적인 것을 추구하는 과학적 학문관, 사실적 그림의 유행과 부귀와 장수를 위한 부적 역할을 했던 나비 그림의 수요 증가도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나비에 지극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으로 본다. 누군가 그에게 왜 나비만 그리냐고 묻자 “매미는 가련한 벌레나 나비는 일생을 아방궁에서 살지 않은가”라는 대답에서 미적이고 몽환적인 작품관과 한평생 나비에 푹 빠져있던 연유를 잘 알 수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눈에 들어온 나비를 쫓아 10리나 쉬지 않고 달려간 그는 나비를 그리는 종이 또한 금가루가 뿌려진 냉금지를 사용하였고 나비의 노란색은 금가루, 흰색은 진주 가루를 사용했다고 하니 선생의 나비에 대한 순수한 열망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림을 그릴 때 금가루와 진주 가루를 이용하는 방법은 현대의 ‘마티에르 기법(종이 및 캔버스 등 바탕 재질, 붓놀림, 그림의 재료 등이 만들어 내는 기법상 화면의 재질감을 뜻함)’과 유사하다고 한다. 이런 선생만의 기법으로 인해 현재까지 오래된 작품이지만 방금 그린 것처럼 나비가 선명해 보이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극찬한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 철저한 관찰 외에도 깊은 탐구심이 창작의 기반이 되었는데, 작품에 남긴 제발에서 알 수 있듯 <유양잡저>라는 책을 통해 나비를 연구하였다고 전해진다.
나비에 대한 일편단심을 지킨 그에 대한 자연의 답례일까? 남계우 선생은 80수를 누리는 행운을 선물 받았다. 부귀와 장수의 상징인 나비를 물질적인 가치로서가 아닌 순애보로 한평생을 함께 한 그에 대한 선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본다.
다방면에 능숙한 이가 주목받는 시대이기는 하나 한 가지에 오롯이 빠져들어 크나큰 결과물을 만들어낸 이들이 존경받는 이유는 강한 인내력과 식지 않는 열정, 무엇보다 꾸준한 노력에 있다. 더군다나 노력보다 쉬이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일만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한 우물만 파고들 수 있는 끈기는 결핍된 비타민처럼 필수적인 함양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이 어수선한 요즘이나 자연은 늘 그러하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운 봄 선물을 만들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비를 평생 반려자처럼 아끼고 사랑한 남계우 선생의 순수한 마음을 담은 시 ‘영접(詠蝶)’을 소개하며 힘든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네 마음에 작은 선물이 되기를 바라본다.
“따뜻한 햇볕 산들바람 날씨 좋은데 부드러운 더듬이 비단 날개로 천천히 맴도네. 전생이 채향사였음을 알겠으니 작은 꽃 숨은 풀까지 뒤적이며 날아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