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과 여성의 직업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지만 아직 사람들의 편견은 여전한 듯하다. 필자의 경우에도 흔히 듣는 말이 ‘여자인데 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소설을 쓰지 않고 힘들게 남성 작가들이 많이 집필하는 역사소설을 쓰는가’이다. 남성이기에 냉철한 지력을 필요로 하거나 외향적인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여성이기에 부드럽고 섬세한 감성을 바탕으로 한 일을 해야 한다는 사고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떨치지 못함은 분명해 보인다.
이전 시대와 달리 여성의 입지가 한층 높아진 21세기를 살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여자로서 유일한 조선의 실학자셨던 이빙허각 선생께서 보셨다면 한숨을 쉬시며 애통해하셨을 것이다. 제한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며 크나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기에 21세기에 잔존하는 그런 편견에 즉각 반기를 드실 거라고 생각된다.
‘빙허각 이씨’로 알려진 ‘이빙허각’선생께서는 조선을 대표하는 실학자로도 손꼽을 수 있는 여성으로서 유일한 실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빙허각 선생 외에 조선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신사임당’, ‘허난설헌’이 있고, 여성으로서 성리학자셨던 ‘강정일당’ 선생도 계시지만 오늘 소개하는 ‘이빙허각’ 선생께서는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 걸크러쉬와 같은 당당하고도 거침없는 기세로 본인의 삶을 일구어내신 멋진 분이시다.
그녀는 영조 24년 서울에서 수많은 학자를 배출한 당대 명문가인 전주 이씨 가문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선생의 집 안은 소론의 학풍을 따랐고 아버지 이창수는 예조판서와 수어사 벼슬을, 오빠인 이병정은 홍문관제학과 이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었다. 또한 선생의 외가 또한 실학과 고증학 분야에서 많은 학자를 길러낸 집안이었다. 거기다 외숙모이자 <언문지>의 저자 ‘유희’의 어머니인 ‘사주당 이씨’는 <태교신기>라는 책을 집필한 지성이 높은 여인으로 이빙허각 선생의 유년 시절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집 안 분위기로 인해 선생은 양반의 딸로 태어나도 글을 배우지 않은 여인들이 많았던 폐쇄적인 조선 사회에서 학구적인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글을 배우고 많은 양서를 접할 수 있었다.
이빙허각 선생은 평생 <빙허각전서> 3부 11책을 저서로 남겼다. 이 중 유명한 <규합총서>는 <빙허각전서>의 제1부로 5책으로, <청규박물지>는 <빙허각전서>의 제2부로 4책, <빙허각고락>은 <빙허각전서>의 제3부이다. <규합총서>만 현존하고 있고, 나머지 소중한 저서들은 전하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중 <규합총서>는 선생이 51세에 집필한 책으로 참고문헌만 80권이 넘는 많은 이들이 필사하고 20세기 초까지도 사랑받은 생활 경제 백과사전이다. ‘규합’은 여성이 기거하는 규방이라는 의미로 당대 여성들의 살림경제에 도움이 되는 모든 지혜를 5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하는 역대 총서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여성으로서 80권이 넘는 서적을 탐구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일이다. 이빙허각 선생이 이렇게 최고의 저서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녀의 남편인 서유본과 소론의 실학 학풍을 따르는 개방적인 시가의 분위기가 있었다. 시댁에는 수많은 책이 소장되어 있었고 시아버지 ‘서호수’는 <해동농서>, 시할아버지 ‘서명응’은 <보만재총서>를 집필한 대제학을 역임한 학자로 북학파의 선각자로서 널리 알려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시가의 분위기에서 글을 아는 며느리를 이쁘게 보았던지 신혼 시절, 그녀는 5살 어린 시동생인 ‘서유구’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서유구는 훗날 뛰어난 실학자로 <임원경제지>라는 저서를 집필하였는데, 이빙허각 선생이 <규합총서>를 탄생시킨 것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관점이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 선생께서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인 ‘서유본’의 외조가 컸다. 15세에 3살 어린 남편과 혼인한 그녀는 유일한 정인이자 같은 학문을 탐구하는 학문적 동지로서 서유본과 평생을 함께한다. 서유본 또한 동생 서유구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실학자로서 특히 문장이 뛰어나 아버지인 서호수가 홍문관이나 예문관에 지어 올리는 글 초고를 그에게 쓰게 할 정도였다.
서유본은 여타 남편들과 달리 개방적 사고를 지닌 지아비였다. 여인이라 폄하하지 않고 또한 서로 읽은 책에 관해 토론을 할 정도로 그녀의 학문 탐구 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규합총서>라는 책의 제목 또한 그가 직접 지어준 것으로 책의 서문을 직접 써 아내의 저서를 극찬하였다.
이빙허각의 유년 시절에 많은 영향을 준 숙모 사주당 이씨 부부 합장묘(진주 류씨 집안 제공한 자료) (출처 네이버 백과).
남편의 갸륵한 사랑과 외조 덕분에 가능했을까? 그녀는 더욱 큰 원동력을 얻어 고요하고도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다. 이빙허각 선생은 나이 마흔이 넘어 큰 시련이 닥쳐온다. 시댁 작은아버지인 ‘서형수’가 안동 김씨와 관련된 사화에 관련되어 옥사하면서부터 몰락한 집 안을 일구기 위해 잠재되었던 그녀의 강인한 걸크러쉬 기질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지금의 서울 용산으로 거처를 옮긴 그녀는 학문은 뛰어나나 관직과는 인연이 없던 남편 대신 직접 차밭을 일구며 씩씩하게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낸다. 이 시기에 축적된 집안 살림 경영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규합총서>를 저술하게 된다.
평생을 학문적 지기이자 정인으로서 자신을 깊이 사랑한 남편 서유본이 죽자 선생은 짝을 잃은 원앙처럼 슬퍼하다 2년 뒤 남편의 뒤를 따른다.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모습을 ‘정려’를 위한 친정의 가풍을 따랐다고 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해원’교수의 의견이 있다. ‘정려’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로 이빙허각 선생은 곡기를 끊고 남편을 위해 사당 앞에서 빌기로 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찌 보면 규방의 꽃이 아닌 지성을 갖춘 학문적 동지로 자신을 아낀 남편에 대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라 볼 수 있으나, 본가의 증조부 ‘이언강’의 아내 권 씨 부인, 숙부 ‘이창의’의 아내 윤 씨 또한 남편을 따라 죽어 정려를 하사받았기에 어느 정도는 그녀의 우울한 말년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볼 수 있어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살아온 여인으로서 그녀가 탈피하지 못한 굴레이자 한계라고 ‘정해원’ 교수는 말하고 있다.
말년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빙허각 선생은 타고난 적극적인 에너지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과 학문을 사랑하셨다. 더군다나 풍족한 형편 속에서 여유롭게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남편 대신 가장으로서 고된 일상을 버티며 이리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은 현시점에서도 과히 다시 평가받아야 할 일이며 그 투지와 인내심은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이빙허각의 현존하는 저서인 ‘규합총서'(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여성에게 가혹했던 조선이라는 나라에 살면서도 선생은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랑을 놓지 않고 ‘여성으로서 유일한 조선의 실학자’, ‘조선을 대표하는 경제학자’라는 멋진 프로필을 만들어내셨다. 물론 아직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남성과 동등한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것이 가능한 21세기를 사는 여성으로서 선생의 뜨거운 여정을 보며 깊이 반성하고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여전히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남성과 여성에 대한 잘못된 관점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편견을 깨기 위한 여성 스스로의 각성과 사회적 개선 또한 계속되어야 한다. 성에 의해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는 그 자유롭고도 찬란한 시간이 오기를 고대하며 아직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