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중국에서 시작된 한류열풍이 아직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음악, 패션, 드라마 등 우리의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한류의 열풍은 오늘날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좀 더 거슬러 조선시대에도 일본 열도를 달구었던 한류 열풍이 있었는데, 그 주역들은 바로 조선통신사에 동행한‘마상재인’이다.
임진왜란으로 악화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선단과 행렬은 일본의 민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특히 사절단을 따라간 전문가 중 일본 현지에서 가장 뜨거운 인기를 얻은 이들은 마상재인(혹은 마재인)이었다.
마상재는 말을 타면서 부리는 전문 기예이다. 몽골에서 기인했다는 일각의 주장과 다르게 중국의 「후주서」에 기록되어 있듯, 마상재는 고구려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고유문화 유산이다.
마상재를 하는 마상재인은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호위무관으로 경호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통신사에 마상재인들이 동행하는 관례가 생겨난 것은 인조 14년 제4차 통신사행부터였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와 불안한 상황으로 후방의 안정과 유연한 관계 형성을 위해 일본인들이 갈망하는 마상재인 최고수 2명을 선발하여 보내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마상재는 일본인들이 ‘천하제일’이라고 찬사를 보낼 만큼 명성이 자자했는데, 일본의 최고 통치자까지 친히 나와 관람하고 행사가 끝나면 후한 상금과 선물 하사할 정도였다. 또한 마상재 공연은 통신사의 최종 목적지인 에도에서 성황을 이루었는데, 공연장이 한 군데가 아닌 세 군데나 되었으며 일본 최고통치자들 앞에서 하는 공연이라 성대하게 치러졌다. 마상재인들은 관백이 타는 말을 직접 조련해 주기도 하고, 통신사들이 귀국할 때에는 마상재를 선보인 조선의 명마를 달라고 졸라서 몇 마리를 선물로 주고 오기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당시 일본인들이 우리의 마상재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도라 하겠다.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 소장된 「조선인희마도」(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조선에서는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하던 마상재가 일본에서 높은 우대를 받은 것은 일본의 사회적 풍토 덕분이었다. 「봉사일본시문견록」에 마재인이 다른 전문가들보다 두 배의 상금을 받았다고 적혀있듯, 문예를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글씨나 그림을 가치 있게 여기나, 무예를 숭상하는 일본에서는 정반대로 마상재를 더 높이 평가한 것을 알 수 있다.
열도를 뜨겁게 데운 마상재는 일본인들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막부시대 덕천 장군의 요청으로 기마술이 능한 마상재인 2명이 마상기예를 펼친 감동적인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또한 조선의 마상재를 본 따‘다아헤이본류’라는 일본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었고 마상재를 흉내 내는 곡마사(曲馬師)가 나타나 흥행하면서 일본 각지에서 곡마가 공연되었다. 현존하는 각종 그림, 서적, 장신구에도 마상재가 등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마상재인이 탄 말을 구매하려는 자와 조선의 마상재용 말을 사려는 자들이 많아 조선에 사람을 보냈다고도 한다.
이러한 큰 인기로 인해 오만방자한 마상재인의 폐해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통신사가 지나는 지역마다 행패를 부려 각 고을이 입는 피해가 크다는 후문이 많은데, 이는 1719년 통신사 군관 김흡이 쓴 「부상록」에 잘 나와 있다. 또한, 마상재의 수행원이 되기 위해 불필요한 사람들이 통신사에 따라가는 피해도 있었는데, 경기도의 조그만 군현에서도 마상재 1명을 돕는다는 핑계로 7~8명이 따라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화려한 과거를 지닌 마상재는 18세기 말, 무사들의 기피 경향과 19세기 중엽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거의 사라져버릴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그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계승하고자 하는 분들의 노고로 지금까지 명맥이 이어져 지역 축제나 주요 문화 행사 때 대중들에게 자주 선보이고 있다.
전통을 빛내는 것은 우리의 것을 또 다른 눈으로 보고 그 가치를 찾아내는 데서 시작한다. 조선보다 타국인 일본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마상재의 한류 열풍을 되짚으며, 퇴색되거나 숨겨진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들이 더 많이 재발굴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