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장한형 기자] 최근 디지털 세상에서 소외되는 노년층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일이 벌어졌다. 한 은행이 지점 점포를 폐쇄하고 직원 1명만 상주하는 디지털 라운지로 전환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70대 이상 고령자가 주축이 된 주민들이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강하게 반발했다.
은행 측이 해당 주민들과 간담회를 열고 대화를 이어가며 해법을 찾고 있지만, 노년층의 디지털 격차와 소외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디지털 기술은 시간이 갈수록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빠를수록 디지털 세상에서 더 멀어지는 노년층을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한국은행이 연구조사한 결과 60세 이상 노년층 가운데 스마트폰과 같은 기기를 활용한 모바일 뱅킹 이용률은 5.5%에 불과했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매년 실시하는 디지털격차 실태조사에서도 주요 인터넷 활용 항목 모두 60대 이상이 가장 낮게 나타났다.
은행 지점 폐쇄, 크게 반발한 주민들
지난 3일 오후, 서울시 노원구 월계동의 한 아파트 단지 상가 앞에서 주민 70여명이 모여 시위를 겸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신한은행 폐점에 따른 피해 해결을 위한 주민대책위 기자회견’이었다.
이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던 신한은행 지점이 폐쇄되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면서 대책 마련을 촉구한 것. 이날 모인 주민들은 대부분 70대 노인들이었다.
주민들은 “노인층 배제하고 주민편의 무시하는 무분별한 은행폐점에 반대한다”면서 신한은행과 정치권에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촉구했다.
이처럼 이 지역 주민들이 기자회견까지 열면서 집단행동에 나선 이유는 잇따른 은행 폐점이었다. 인근 상가 국민은행 출장소가 폐점 결정된 데 이어 내년 2월 신한은행마저 폐점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신한은행까지 문을 닫으면 5000여 세대가 거주하는 이 지역에 은행은 단 한 곳도 남지 않게 된다. 게다가 이 지역 주민의 절대다수가 고령층인 사정을 감안하면 디지털화하는 금융서비스에서 노년층은 철저하게 배제될 처지다.
주민들 “출장소라도 남겨라” 요구
이날 집회 겸 기자회견에 참여한 주민들은 “5000세대 넘게 거주하는 단지에 유일한 은행이 일방적으로 문을 닫는 것이 말이 되느냐”면서, “은행이 없어지면 멀리까지 가야 하는데 노인들은 불편해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대책위 공동대표는 “금융이 일반 사기업처럼 그저 돈벌이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며, “공과금, 관리비, 노령연금, 재난지원금, 임금 수령 등 수많은 거래가 은행에서 이뤄지는 만큼, 금융은 주민들 삶에 있어 필수영역이기 때문에 공공의 영역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민대책위는 신한은행 측에 디지털 라운지 전환이 아니라 출장소로 축소할 것을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면서 “디지털 기술에서 소외될 수 있는 주민불편에 적극적인 대책을 수립하라”고 촉구했다. 국회의원, 구청장 등 정치권에도 “주민대책위로 결성된 주민의 뜻을 받들어 적극 문제 해결에 나서라”라고 촉구했다.
은행 측 절충안에도 “주민불편 불가피”
주민대책위원회와 금융 관련 시민단체가 합세해 16일 오전 서울 중구 신한은행 본사 앞에서 신한은행 월계동 영업지점 폐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대해, 신한은행은 이튿날인 17일 오후 ‘디지털 라운지 전환 주민간담회’를 마련하고 주민들과 대화에 나섰다.
신한은행 측은 간담회에서 “화상상담으로 업무가 진행돼도 안내 직원을 배치해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설명했다. 이날 신한은행은 당초 디지털 라운지에 상주하며 안내를 돕는 직원 1명을 배치한다는 계획을 수정해 상주 직원을 2명으로 늘리고, 2개월 동안 창구 지점과 디지털 라운지를 함께 운영하면서 ‘완충기간’을 두겠다고 밝혔다.
간담회 후 일부 주민들은 디지털 전환에 적응하도록 노력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고령의 대다수 주민들은 “설명을 들어도 모르겠고, 불편해도 다른 지역 은행을 다닐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 점포 폐쇄, 고령층 소외 심각
은행들은 오프라인 점포를 없앨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에 따른 노년층의 불편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5대 시중은행의 점포 폐쇄 계획에 따르면, 은행들은 지난달 11월까지 모두 203개 점포를 폐쇄했다. 은행 별로는 신한은행이 75개로 가장 많은 점포를 없앴고, KB국민은행 53개,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은 각각 31개, NH농협은행 13개 순이었다.
이처럼 은행 점포가 없어지면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못한 노년층이 직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70대 이상 고령층이 현금인출을 위해 금융기관 창구를 이용하는 비중이 53.8%에 달한다. 전체 평균 25.3%에 비해 두 배나 높다.
모바일 익숙치 않은 노년층 ‘타격’
고령층의 현금 이용, 대면거래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점포 폐쇄는 곧바로 노년층의 불편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모바일 뱅킹을 이용하는 70대 이상 노인은 10명 가운데 1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행이 최근 내놓은 모바일 금융서비스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70대 이상 응답자 가운데 ‘모바일 뱅킹 서비스를 최근 3개월 이내에 이용했다’는 응답자는 6.3%에 불과했다. 30대 87.2%, 40대 76.2%가 이용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모바일 뱅킹 서비스를 이용한 비율은 50대까지 51.0%로 과반을 유지했지만 60대에선 18.7%로 떨어지면서 연령대가 높아갈수록 이용률은 급감했다.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을 이용한다는 70대 이상 노인은 0.1%로 거의 없었다.
70대 이상 고령층의 58.8%가 “모바일 금융 서비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그만큼 각종 모바일 서비스가 고령층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디지털 격차 대안 마련 시급
고령층의 디지털 이용 수치가 청년이나 장년에 비해 지나치게 낮다면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은행도 70대 이상 모바일 서비스 이용률이 5.5%에 불과하다면 당장 대책이 필요한 사회문제로 상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60세를 넘어서면서 디지털 이용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복지정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갈수록 고령화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디지털 격차를 방치하면 사회적 갈등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디지털 격차에 따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1년 ‘정보격차 해소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이 법에 따라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설립된 만큼, 고령자를 비롯해 저소득층, 장애인, 다문화가족에 대한 정보화 지원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정보약자의 디지털 정보격차 해소를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관련법을 통해 일상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강제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