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에 조성된 독일마을 전경. 사진=남해독일마을.com

[시니어신문=주지영 기자] 과거 굶주리던 시절,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로 건너간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지난 2010년 활동을 종료한 과거사위원회가 내놓은 파독 광부·간호사들에 조사결과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과거사위원회는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해외 파견된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전체 송금의 11%에 달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관심과 배려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독일 현지에 기념회관을 지으라며 건넨 3억원이 고작입니다. 그것도 파독광부들이 찾아가지 않은 연금 17억원을 돌려주며 보탠 금액입니다. 파독 광부·간호사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6·25전쟁 직후인 1960~1970년대 국가재건을 위한 개발연대(開發年代) 초기, 외화 획득과 실업률 감소 등을 목적으로 독일에 파견돼 경제발전에 혁혁하게 기여한 파독 광부 및 간호사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특히 본격적인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의 과거 공로를 인정해 안락한 노후생활을 국가가 지원하는 정책적 논의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010년말 활동을 종료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1960∼70년대 독일에 근로자로 파견된 파독 광부·간호사의 공식 규모는 광부의 경우 1963년부터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사는 1950년대 말부터 1976년까지 1만723명 등 총 1만8659명이다.

과거사위원회가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고국에 보낸 송금액은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총 1억153만 달러로, 1965~1967년의 경우 총 수출액 대비 각각 1.6~1.9%에 달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이 액수는 미국이나 일본, 월남, 그리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동지역 등에 파견된 우리나라 근로자들의 총 송금액 9억1371억 달러의 11%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는 지난 2007년 4월부터 2008년 8월 초까지 문헌자료 검토를 비롯해 독일과 북미 현지조사, 참고인 및 전문가 면담, 관련기관 자료 수집과 검토를 통해 뒤늦게 이뤄졌다.

독일마을 맥주축제 무대에 오른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주민들. 사진=사진=남해독일마을.com

과거사위 “경제발전에 선구적 기여”

이에 앞선 2006년 11월, 각각 파독 광부와 간호사였던 김한용·최말순씨가 “파독 광부·간호사들이 독일로 건너가 파견 근로자로 일하면서 임금을 고국에 송금하는 등 한국경제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한 점 등에 대해 진실규명을 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과거사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됐다.

과거사위원회는 “파독 광부·간호사의 송금액은 (수출품에서 수반되는 원자재비용이 전혀 없기 때문에) 가득률이 100%에 달했고, 단 1달러의 외화도 소중한 1960년대 한국의 경제상황에 비춰보면 국제수지개선, 국민소득향상, 나아가 경제성장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결정했다.

또 “파독 광부·간호사들은 독일에서 근무한 뒤 현지에 잔류하거나 유럽, 북미 등 제3국으로 진출해 재외한인사회 형성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도 인정했다.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자들은 3년으로 제한된 파견근무 이후 독일 현지에 계속 거주하거나 미국, 캐나다 등으로 이주, 이민 1세대로서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간 국내 언론 등에서 제기된 “파독 광부·간호사의 임금을 담보로 1961년 독일로부터 상업차관을 성사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상업차관은 한·독 정부간 체결된 ‘경제 및 기술협조 의정서’에 의거한 원조의 일종으로, 파독 광부·간호사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과거사위원회는 “파독 광부·간호사는 최초의 대규모 해외 인력파견으로, 이들이 현 국제화시대 이전 해외 개척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며 “우리나라 이민사 및 해외동포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일로, 정부 또는 관련기관이 파독 광부·간호사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기록을 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독일 현지 ‘파독광부기념회관’ 건립

파독 광부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으로 2010년 4월 독일 에센에 ‘파독광부기념회관’도 건립됐다. 하지만 건립비 대부분은 파독 광부들이 찾아가지 않은 연금이어서 빛이 바래기는 했다.

파독광부기념회관 건립 재원은, 파독 광부들이 적립하고도 찾아가지 않아 독일정부가 1984년 한국정부에 이관한 17억원의 연금에 정부지원금 3억원을 더해 20억원이 전해졌다. 기념회관은 파독광부들의 쉼터이면서 이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실을 갖췄다.

파독광부들의 모임인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에 따르면 기념회관은 대지 3190㎡, 건평 754㎡로, 250여명이 모일 수 있는 규모다. 이 기념관은 한국 노동부가 ‘파독광부 복지사업 매뉴얼’에 따라 가톨릭교회를 매입해 리모델링했다.

‘글뤽아우프’는 위험한 갱도로 내려가는 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행운을 빕니다’라는 독일 인사말이다.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관계자는 “기념회관은 지난 과거만을 보여주는 장소에 그치지 않고 한인사회 전체의 한인문화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며 “개관식에 주독일대사와 한인단체, 노동부 장관, 현지진출 한국기업, 독일 에센시장, 광산과 종교 관계자 등을 초청해 파독 광부의 노고와 역사적 의미를 재평가했다”고 밝혔다.

기념회관 건립은 독일정부가 한인들이 광부로 일할 때 적립했으나 주인을 찾지 못해 지금까지 수령하지 않은 연금을 1984년 한국정부에 이관하면서 시작됐다.

우리 정부는 2007년까지 지급절차를 밟아 왔지만 결국 17억원의 주인을 찾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정부는 2009년 남은 연금에 정부 예산을 더해 20여억원의 기금을 만들어 파독광부 단체에 전달했다.

남해 ‘독일마을’로 이주 귀국

경남 남해군이 조성한 ‘독일마을’도 파독 광부·간호사를 위한 의미 있는 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해군은 지난 2000년, 남해문화예술촌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독일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투자유치를 벌여 2003년 9월 ‘독일마을 프로젝트’를 완공했다.

하지만 당초 110명이 입주, 사업참여를 희망했지만 본래의 취지가 아닌 ‘펜션 관광촌’으로 퇴색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초기 입주한 35가구 가운데 귀환 정착한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 가구는 13가구에 불과했다. 지금은 한국인 아내를 맞은 독일 남성들도 함께 건너와 35가구 중 20여 가구가 남해 앞바다의 수려한 풍광을 자원 삼아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주민들은 마을운영회 산하 ‘독일마을행복공동체 영농조합’을 설립, 독일의 유명한 소세지와 맥주를 남해지역특산물인 유자, 흑마늘, 멸치 등과 결합해 특색있는 제품을 개발해 직접 판매하고 있다. 또, 독일 동화체험사업과 파독 광부·간호사 추모공원을 조성해 독일문화체험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이 같은 주민들의 노력의 결과로 지난해 7월, 파독전시관이 완공됐다.

이밖에 매년 10월 초에는 독일마을 맥주축제를 열고 마을체험, 맥주만들기 체험 등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면서 지역주민은 물론, 관광객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경상대 이영석 교수(독문과)는 “남해 독일마을의 경험을 바탕으로 귀국을 희망하거나 이미 귀국한 파독 광부·간호사 출신자들에 대한 실질적 예우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며 “이들의 귀국 또는 노년의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에 초점을 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들의 연령이나 건강을 감안한 복지시설 개념의 실버타운 조성이 실질적인 수요에 부합할 것”이라며 “현행 ‘상훈법’에 따른 서훈 대상이 될 수 있는지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