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은 최고의 장식으로 그 존재를 빛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편협한 이들에 의해 파멸로 이끄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조물주의 아름다운 저주로 인해 고통을 겪은 이들은 여성들이 대다수였지만 흔치 않게 남성들도 험난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미색뿐만 아니라 그 지닌 출중한 능력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이로 제일 먼저 ‘안평대군’을 떠올릴 수 있다.
알다시피 안평대군은 세종의 셋째 아들로서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의 희생양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은 ‘이용’, 자는 ‘청지’, 호는 호연지기를 지닌 그답게 ‘비해당’, ‘낭간거사’, ‘매죽헌’으로 불렸다. 다방면에 능한 세종의 아들이었기에 문무에 출중한 그의 형 수양대군과 더불어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 분야에 어려서부터 두각을 보이기 시작하여 열두 살에 형 수양대군, 동생 임영대군과 성균관에서 공부하기 시작한다. 수양대군과 더불어 문무에 능하였으나 특히 안평대군은 문필과 관련한 일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북방개척으로 확보한 ‘사진(四鎭)’의 백성을 서용하고 경재소를 운영하는 일을 그에게 맡기기도 했으나 <치평요람>의 편찬, <운해> 번역, <의방유취> 감수하는 문한에서 그의 능력을 크게 각인시켰다.
‘삼절’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서화에 능한 그는 특히 서예가로 당대 이름을 떨쳤고 현존하는 작품들로부터 그 화려한 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조선의 사대 명필가를 손꼽으라면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를 이야기하고 그 중 두 사람만 선택하라면 ‘안평대군’과 ‘한석봉’을 들 수가 있다. 얼마 되지 않은 유작들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그의 서체는 아름답고도 유연하나 힘찬 기개가 넘쳐흐른다. ‘송설체’로 알려진 조맹부체를 공부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필체를 만들어낸 그의 필체는 중국 황제에게까지 알려져서 명의 사신들이 조선에 입국하면 안평대군의 글씨를 받아가기 위해 기다릴 정도였다고 한다.
문종의 즉위한 해에 <역대제왕 명현집>, <왕희지 진행초> 등의 서법 판본을 바쳤고, 단종 즉위년에는 아버지였던 세종의 영릉 신도비에 글씨를 써서 현재까지 그의 필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버지의 한글 창제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원래 훈민정음 해례본 판각 글씨도 원래 그의 솜씨였으나 현존하는 해례본은 첫 장만 안평대군의 글씨체를 모방하여 다시 만들어 붙인 영인본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세조가 즉위한 뒤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세조에 의해 수많은 그의 작품들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임진왜란 때 강탈당하여 일본 덴리 대학에 소장 중인 안견의 <몽유도원도>의 발문과 <세종대왕영릉신도비>이다.
또한 안평대군은 조선 최초의 회화 수장가였다. 그는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예술을 사랑하고 권장한 예술 애호가이자 후원가로 당대 많은 이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신숙주의 <보한재집>‘화기’편에 따르면 열여덟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십년 동안 안평대군은 222점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안견의 작품을 빼고는 대부분 중국 서화가의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많은 작품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왕족인 그의 신분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볼 수 있다. 안평대군은 수집한 걸작들을 당시 주요 인사들에게도 빌려주어 예술의 발전에 중요한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러한 예술 후원가로서의 그의 행적은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명작으로 남겨져 후대에 감동을 전하고 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되던 어느 봄날, 안평대군은 꿈 속에서 박팽년과 성삼문과 아름답고 신비로운 도원을 노닐고 있었다. 꿈에서 깬 그는 최고 화가인 안견에게 그 풍경을 이야기하여 그리게 했고 발문을 직접 써 당대 최고 화가와 최고 서예가가 같이 한 최고의 역작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명작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안평대군에게 큰 후원을 받은 안견은 끝까지 그의 곁을 지키지 못하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계유정난을 앞두고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안견은 의도적으로 대군의 아끼는 먹을 훔쳐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어 수양대군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꿈속의 황홀한 풍경을 잊지 못한 안평대군은 지금의 서울 부암동 일대를 거닐다 꿈과 유사한 곳을 발견하고 별장을 지었는데 이곳은 현진건 작가의 집 터 로도 알려진 ‘무계정사’이다. 불행히 이 별장도 형 세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타고난 예술적 감성과 폭넓은 식견을 지닌 그는 많은 이들이 존경하며 따랐지만 그 출중한 능력 때문에 아버지 세종과 동복 형제였던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십팔 남 사녀를 둔 세종은 살아생전 많은 자녀들 중 가장 뛰어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을 거리를 두고 대했다고 한다. 또한 호방하고 도량이 넓은 성품으로 인해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안평대군은 당대 고명대신이었던 김종서, 황보인과 함께 ‘황보정사’라는 인사 행정기관을 장악한다. 이 일은 어린 단종을 위협하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배후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되고 후일 형제간에 일어난 불행한 비극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형제란 세상에서 태어나 최초로 마주하는 경쟁자라는 말처럼 수양대군도 오랜 세월 안평대군에게 경쟁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아니면 반대편에 서서 사사건건 방해하는 동생이 노여웠는지 계유정난을 일으킨 명분으로 안평대군의 반역을 들먹인다. 이미 한 배에서 태어난 혈육이지만 권력 앞에 냉정한 세조는 난을 일으킨 당일 그를 잡아 교동동(지금의 인천시 광화군 교동면)으로 유배 보내고 팔일 만에 사약을 내리는데 이때 안평대군의 나이는 서른여섯이었다. 세조는 단종의 즉위를 꾀한 또 다른 동복동생이었던 금성대군에게는 사형을 면하는 대신 유배지를 변경하는 아량을 베풀며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으나 안평대군에게만은 팔일 만에 사사를 명할 정도로 무자비했다. 그만큼 그의 뛰어난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명백한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서른여섯 해란 짧은 삶 속에서 안평대군이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러기에 그의 허망한 죽음이 더욱 슬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지존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왕족은 왕실의 곁가지라는 고달픈 운명을 껴안고 살아야한다는 슬픈 숙명을 아름다운 천재 예술가인 안평대군 또한 비껴가지 못한 것이다. 안타까운 죽음은 마음에 깊은 슬픔을 안겨놓기에 더 큰 그리움을 자아내는지도 모른다. 그가 남긴 짧고도 화려했던 삶은 영원한 아쉬움과 함께 더 큰 감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여전히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