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이 70세에 그린 자화상. 출처 : 국립부여박물관
강세황이 70세에 그린 자화상. 출처 : 국립부여박물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예술가는 절친한 지기이든 평생을 건 경쟁자든 다른 예인들과 직간접적인 소통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성해나간다. 인상주의의 화려한 꽃을 피우게 한 마네와 모네, 인류사에 전무후무한 걸작들을 남겨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완성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죽을 때까지 친구이자 경쟁자였던 피카소와 마티스 등 많은 예술가의 우정과 경쟁은 일생의 과업인 최고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조선 후기 미술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사제 관계이자 평생지기로서 아름다운 우정을 주고받았던 18세기 예원의 총수인 ‘표암 강세황’과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꽃피운 예원의 대들보이자 현재까지도 천재 예술가로 존경받는 ‘단원 김홍도’이다. 조선 후기 서화가이자 평론가인 강세황은 제자인 김홍도 외에도 ‘신위’를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항상 최고의 평론은 김홍도의 것이었다고 한다. 신필, 신품, 입신 등으로 칭찬한 애제자인 단원을 “화가는 각각 한 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한다. 그런데, 단원은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고 극찬했다.

강세황의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 호는 ‘첨재’, ‘산향재’, ‘박암’, ‘의산자’, ‘견암’, ‘노죽’, ‘표암’, ‘표옹’, ‘해산정’, ‘무한경루’, ‘홍엽산서’, 시호는 ‘헌정’이다. 주로 불리는 그의 호인 ‘표암’은 그가 어릴 때부터 등에 표범무늬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3남 6녀의 막내로 출생한 그는 아버지 ‘강현’이 64세에 얻은 늦둥이라 부친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대로 부유했던 집안 형편으로 인해 그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좋은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로 불리는 강세황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모습을 보여 8세에 시를 짓고, 13, 14세에 그가 쓴 글씨로 병풍을 만든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장수 집안이었는지 79세에 유명을 달리한 선생은 조부인 ‘강백년’, 부친 ‘강현’과 함께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기로소에 71세에 들어가 삼세기영지가로 칭송받았다.

송도기행첩에 수록된 강세황이 그린 ‘태종대'(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부유한 가세는 경종의 죽음으로 부친이 유배 길에 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맏형인 ‘강세윤’이 이인좌의 난에 연계되어 모함으로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불행을 지켜본 젊은 강세황은 벼슬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입신양명의 꿈을 접었다. 환갑이 넘어 영조의 배려로 벼슬길에 들어서기 전까지, 강세황은 스무 살에 부모를 모두 잃은 뒤 오로지 시서화에만 몰두하게 된다. 32세 때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하여 ‘청문당’에 머물며 ‘안산 15학사’로 지칭되는 처남인 ‘유경종’, ‘이용휴’, ‘허필’, ’엄경응‘, ’이수봉‘, ’채제공‘ 등 과 교우하여 선생의 예술적 안목을 더욱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선생이 이렇게 예술세계에 집중한 것은 아픈 현실을 잊고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싶다.

강세황의 ‘피금정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방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강세황은 중국 역대 명필들의 글씨체를 공부하여 각 서체에서 모두 뛰어났는데, 한국적인 남종문인화법과 진경산수화의 발전에도 기여한 인물이다. 특히 선생은 처음으로 서양화법을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현실감 있는 산수를 그리기 위해 고민하던 그는 서양적인 명암법으로 입체감 있는 걸작들을 그려내었다. <송도 기행첩>에 실린 ’영통동구도‘라는 그림에서 이러한 서양의 명암법을 응용하였다. 선생의 끝없는 실험 정신은 따로 그리던 사군자를 처음으로 한 벌로 맞추어 그린다던가, 대나무 8폭을 판화로 제작하는 등 개방적이고도 진취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전통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위해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선생의 이러한 창작인으로서의 태도와 열정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예술가 또한 본받아야 기본 태도라고 본다. 강세황의 화풍은 후일 ’심사정‘, ’김홍도‘, ’김윤겸‘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예술가로서의 성실함은 청의 건륭제 80세 생일잔치에 다녀온 뒤 그린 사군자 작품을 보면 잘 나타난다. 이전과 다르게 더욱더 깊어진 품격은 항상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려는 뜨거운 열정의 산출물이다.

또한, 예술가로서 창작에만 열정을 쏟지 않고 선생은 평론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높은 안목과 식견으로 화평 활동을 통해 화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던 오랜 기간 동안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 평론을 남겼으며 이러한 활동은 남종화가 유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특히, 애제자인 김홍도의 작품에 많은 평을 남겨 제자에 대한 스승의 각별한 정을 느끼게 한다. 과히 당대 화단을 위한 진정한 후원자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이 당대 제일의 평론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시서화에 능하고 높은 안목도 있으나, 문화 예술계 인사들과의 다양한 소통의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강세황의 ‘난죽도권’.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선생이 70세에 그린 자화상의 화제에는 이러한 글이 적혀 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수염과 눈썹이 새하얀데, 머리에는 사모 쓰고 몸에는 평복을 걸쳤구나. 오라, 마음은 시골에 가 있는데 이름이 벼슬아치 명부에 걸린 게라 가슴에는 수천 권 책을 읽은 학문 품었고, 감춘 손에 태산을 뒤흔들 서예 솜씨 들었건만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내 재미 삼아 한번 그려 봤을 뿐인데. 노인네 나이 일흔이요, 노인네 호는 노죽인데 자기 초상 제가 그리고 그 찬문도 제 지었으니 이 해는 바로 임인년이라. 젊은 시절 겪은 비극으로 사대부가에서 태어난 사내로서 큰 꿈을 접고 예술이란 외길을 걸어가야 했던 그의 드러나지 않은 깊은 슬픔이 느껴져 마음이 더욱더 애잔해진다.

힘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여정으로 강세황은 역사에 길이 존경받는 진정한 예원의 총수이자 진정한 화단의 후원자로 남아있다. 많은 이들이 힘든 현실을 벗어나고자 자구책을 찾는다. 현명한 선택은 더 나은 삶으로의 전환점으로 이끌지만, 그렇지 못한 선택은 더 깊은 수렁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힘든 삶 속에서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태도로 자신을 단단하게 이끌어온 강세황, 그의 지혜로운 모습에 나태한 마음을 반성하며 새해의 결심을 더욱 야무지게 다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