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최순실’ 명성황후 비선실세 ‘진령군’

언제부턴가 우리에게 비선 실세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알다시피 비선 실세란 권력을 가진 자의 배후에서 은밀하게 실제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자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비선 실세는 항상 존재해왔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보이지 않은 실세들이 수많은 역사의 비극을 만들어냈는데, 실질적으로 얻는 부귀영화 외에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뒤에서 조정한다는 그 짜릿하고도 묘한 쾌감이 권력욕을 더욱 가속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것이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었다.

역사 속 비선 실세 중 간간이 정치적 메커니즘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아닌 종교인들과 무속인들이 눈에 띄는 데 이들은 불안한 지도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 말기의 신돈, 러시아의 라스푸틴, 미국의 점성술사 조엔 퀴글리 등이 있는데 오늘 소개할 인물은 조선 후기 명성황후의 비선 실세로 십 년 넘게 국정을 농단했던 ‘진령군’으로 알려진 무녀 이씨다.

뮤지컬 ‘명성황후’ 공연 중 진령군의 수태굿. 출처 : 네이버포토

무당은 신분의 차별이 극명한 조선 시대에 칠천으로 여겨질 만큼 천대받던 이들이었다. 인류가 이 세상에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자인 무속인들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되면서 그들의 막강한 힘은 축소되었고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등장으로 무속에 대한 배척과 탄압이 강도를 더해가기 시작하여 심지어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을 통해 무속을 배척하는 방법을 법제화하게 된다.

진령군을 총애해 국고를 탕진한 명성황후. 출처 : 네이버포토

인간의 마음이란 본시 유약하고도 간사하여 아직도 불안한 삶에 대한 자구책으로 무속의 힘에 기대는 경우가 빈번하다. 배척당한 무속인이었으나 사람들은 끝없이 그들을 찾았고 한 나라의 국모이자 명민한 여성이었던 명성황후조차 하나뿐인 허약한 아들이 몸져누울 때마다 무속의 힘에 기대 국고를 탕진하기에 이른다. 무속을 맹신한 명성황후를 자극하여 더욱 혜안을 흐리게 한 이가 곁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진령군 여대감’으로 알려진 무녀 이씨이다.

진령군 즉, 무녀 이씨는 충주 사람으로 과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임오군란 때 분노한 병사들에게 쫓기던 명성황후가 충주 장호원에 몸을 숨길 때 첫 인연을 맺는다. 권력을 잃고 목숨까지 빼앗길까 매일 두려움에 떨던 왕비에게 무녀는 직접 찾아가 곧 환궁할 것임을 예언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의 말대로 왕비는 피신한 지 오십 여일 만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되었고 무녀 이씨를 신임하다 못해 직접 궁으로 데려와 곁에 두고 수시로 찾는다. 많은 관료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럴수록 왕과 왕비는 더욱 그녀를 두둔하였고 이미 관왕묘(관우장을 모시는 사당)인 동묘와 남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운상제를 몸주로 모시는 무녀를 위해 또 다른 관왕묘인 북묘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더군다나 갑신정변 때 북묘로 몸을 피한 왕과 왕비는 그 후 무녀 이씨를 더욱 신뢰하다 못해 혈육처럼 의지하게 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권력의 단맛은 끊임없이 그 욕심을 부추긴다. 왕자에 준하는 ‘군’이란 군호를 하사받은 무녀 이씨는 거칠 것이 없었다. 명성황후의 비호 아래 왕실을 위한다는 핑계로 굿판과 제사, 기도가 쉴 새 없이 이어졌고 진령군의 푸닥거리가 늘어갈 때마다 조선의 국고는 점점 그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심지어 금강산 정기로 세자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일만이천봉 한 봉우리마다 쌀 한 섬, 돈 천 냥, 무명 한 필씩을 요구한다. 이미 몇 번 자식을 잃은 슬픔을 겪은 왕비는 외아들을 위해 거릴 낄 것이 없었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몇 년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그 수많은 쌀과 재물을 진지한 장고 없이 무녀의 곳간에 살뜰히 채워준다.

왕비라는 든든한 배경을 둔 그녀에게 조선의 지배계층인 양반 출신 고위 관료들은 의남매를 맺기를 자청하며 굽신거리며 다가가 ‘누님’ 혹은 ‘어머니’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또한 진령군의 위세는 갈수록 치솟아 관리임면권까지 손에 쥐고 매관매직으로 이미 백성의 고혈로 가득한 곳간을 더욱 채워나간다. 그의 아들 김창렬 또한 모친의 뒷배를 믿고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관리 행세를 하고 온갖 망발을 일삼았다고 하니 참으로 양반이 지배하는 유교 중심의 나라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국정 농단을 좌시하지 못한 충신들이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지만 번번이 외면당하다 못해 핍박당한다. 진령군이 득세한 지 11년이 되던 날, 사간원 정언 안효제가 용감히 그녀를 탄핵할 것을 상소로 주장했으나 맹목적으로 무녀를 신뢰하는 왕과 왕비는 그를 전라도의 섬으로 유배시켜버린다. 또한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이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894년 7월, 민씨 세력의 대표 인물인 민영준과 진령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나 백성의 어버이가 되어야 할 왕은 ‘알고 있다’고만 하며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상소를 올려 진령군을 신랄하게 비판한 지석영. 출처 : 네이버포토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단호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개화파 정부가 진령군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여 무녀는 북묘에서 쫓겨나 삼청골 오두막에 숨어 살다 명성황후시해사건 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혹은 명성황후시해사건 뒤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온갖 교활한 방법으로 얻은 부귀와 권세가 영원히 지속하리라 믿고 기세등등하던 그녀는 사필귀정이라는 세상의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고 단죄를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생각은 어리석다. 하물며 옳지 못한 방법으로 취한 것들이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자만하는 것은 더욱 우둔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역사의 경고를 보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권력과 재물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실세’가 되거나 그런 이를 알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황홀한 불꽃에 미혹되어 뛰어드는 불나방이 제 몸이 타들어 가는 것은 깨닫지 못하듯, 탐욕의 불꽃에 스스로 죽어가는 자신을 미처 되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은 결국 비참한 말로를 걷는다.

역사는 항상 경고한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내기도 바쁜 우리는 크나큰 불행을 몸소 겪으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위대한 역사의 교훈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다.‘불행한 역사를 잊어버리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신채호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망각된 비극의 역사는 또다시 반복된다는 가르침을 늘 되새기며 오랜 시간을 거쳐 온 역사의 교과서를 더욱 겸허한 마음으로 펼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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