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교통부와 대한노인회가 ‘공동주택법’ 개정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현재 일정 규모 이상 아파트 단지에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경로당에 대해 주민들의 필요에 따라 다른 시설로 용도 변경할 수 있도록 규제를 완화하는 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이에 대해, 경로당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대한노인회는 “OECD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로 노인복지가 취약한 현실에서 경로당을 통한 집단복지로 그나마 취약한 개별복지를 보완하고 있다”면서, 전체 입주자 등의 2분의 1 이상 동의로 경로당을 폐쇄하고 타시설 등으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는 요건 완화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 시행령 개정에서 공동주택에서 용도변경이 가능한 대상에서 경로당을 제외시켜야 한다는 게 대한노인회 주장이다.

국토부, 공동주택관리법 개정 입법예고했다

국토부는 지난 6월 11일 경로당을 비롯해 어린이집, 놀이터, 운동시설, 작은 도서관과 같은 공동주택 단지 안의 필수시설 용도변경을 허용하고, 입주자들의 동의 요건도 완화하는 내용의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7월 21일까지 입법예고했다.

이 개정안에 따르면, 현재 150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에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는 경로당을 어린이집을 넓히거나 주민운동시설로 용도 변경할 수 있다. 어린이집, 놀이터, 운동시설, 작은 도서관과 같은 필수시설 이외에도 다른 주민편의시설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주민공동시설 용도변경을 위한 주민 동의 요건을 ‘전체 입주자 등(소유자와 사용자)의 3분의 2 이상 동의에서 2분의 1 이상 동의로 완화했다는 점. 이전보다 용도변경이 훨씬 쉬워진다.

또 하나는, 시장·군수·구청장 관할 아래 설치된 건축위원회 심의를 거치면 필수시설 전체를 다른 시설로 용도 변경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경로당과 어린이집을 모두 주민운동시설로 바꿀 수 있게 된다.

국토부, “엄격한 규정이 개별단지 수요&환경변화 수용 못해”

현행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제55조는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 규모별로 반드시 설치해야 하는 시설을 정해 놓고 있다. 150세대 이상에는 경로당과 어린이놀이터, 300세대 이상에는 경로당과 어린이놀이터에 어린이집이 추가되고, 500세대 이상에는 주민운동시설과 작은도서관도 이른바 ‘필수시설’로 반드시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국토교통부는 이 규정과 함께 주민공동시설을 엄격하게 갖추도록 한 공동주택관리법 의무조항이 개별 단지의 새로운 수요나 외부환경 변화를 적기에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행법은 주민 3분의 2 이상이 동의하면, 필수시설을 다른 필수시설로 용도변경할 수 있다. 경로당을 어린이 집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어린이집을 경로당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필수시설을 변경할 수 있는 요건을 주민 3분의 2 이상 동의에서, 2분의 1 이상 동의로 변경한 것.

국토부는 또,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건설 사업계획 승인 시에 경로당과 같은 필수시설이라도 일정 사유가 있으면 설치가 면제되지만, 일단 설치된 시설은 계속 유지해야 해 주민불편과 낭비를 초래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주민 2명 중 1명 이상이 동의하면 필수시설끼리 용도변경이 가능하고, 시군구 건축위원회 심의를 거치면 필수시설 전부를 용도 변경할 수 있게 한다는 것.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건축위원회는 아파트 주민들이 동의한 사안에 대해 반대하거나 심의를 기각하지 않는 관례가 있다.

대한노인회, “경로당 활성화 외면하는 조치” 반발

대한노인회는 이 같은 국토부의 개정안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경로당을 건들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는 7월 1일 국토부에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와 관련하여, 주민공동시설 중 필수시설인 ‘경로당의 용도변경 허용 확대’에 심각히 우려한다”면서 의견서를 냈다. 서울연합회는 이와 함께 “이번 사태에 전국 820만 노인들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입법저지를 위해 분연히 싸우겠다”고 밝혔다.

대한노인회 서울연합회는 의견서에서 “경로당 용도변경 허용 확대는 고령사회 노인여가복지시설인 경로당 활성화를 되레 외면하는 조치”라면서 “이는 공동주택시설 내 세대 간 심각한 마찰을 부를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재가노인의 여가공간이자 쉼터인 경로당이 용도변경 되면 요양원 등 시설복지 수요만 폭증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노인회 중앙회, 개정안 철회 요구 건의서 냈다

대한노인회 중앙회는 전국 17개 시·도 연합회장과 연대하고, 국토교통부가 내놓은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령안을 철회하라고 7월 6일 국토부와 복지부에 건의서를 제출했다.

대한노인회는 국토부와 복지부에 동시 제출한 건의서에서 “OECD국가 중 노인 자살률 1위, 노인 빈곤율 1위로 노인복지가 취약한 현실에서 경로당을 통한 집단복지로 그나마 취약한 개별복지를 보완하고 있다”면서 “전체 입주자 2분의 1 동의로 경로당을 폐쇄하고 타시설 등으로 용도를 변경할 수 있도록 요건을 완화할 것이 아니라 이번 시행령 개정시 경로당은 공동주택 내 필수시설 용도변경 가능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대한노인회는 “노인인구 800만명을 넘어선 우리나라는 고령사회를 지나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두고 있고, 저출산 고령사회에 핵가족화가 급속히 진전돼 노인들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그나마 경로당에서 안식을 찾고 있는 이 시점에 규제 완화라는 미명 하에 공동주택 내 경로당을 다른 필수시설인 어린이집, 어린이놀이터, 주민운동시설, 작은도서관 등과 같은 기준으로 취급해 개정안을 통과시키려 하는 것은 재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복지현장, “경로당 시설&프로그램 강화해야 한다”

사회복지 현장 관계자들은 국토부의 이번 법개정을 반대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는 2025년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고령화에 대비하기 위해서 오히려 경로당의 시설기준을 강화하고 프로그램이나 설비 강화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원영희 한국노인과학학술단체연합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오늘날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경로당은 불필요한 공간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노인복지시설인 경로당을 다른 용도로 변경하는 것 보다, 어르신들이 우선적으로 이용하면서 지역주민과 함께 활용할 수 있는 세대교류 공간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영희 회장은 또, “문재인 정부는 포용국가를 표방하면서 커뮤니티 케어 활성화 정책을 지향하고 있다”면서 “지역사회 내 노인이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경로당이 노인복지 실현의 주요 거점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경로당이 제 역할 다하고 있느냐의 문제다

이번 국토교통부의 법개정으로 경로당이 어린집이나 다른 용도로 바뀔 것이란 이면에는 과연 경로당이 노인복지 차원에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느냐는 의구심이 들어있다.

실제로, 도시지역의 경로당은 대부분 몇몇 어르신들이 독차지하고 모든 혜택을 소수만 누리는 곳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또한, 노인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반해, 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은 오히려 줄고 있다는 점에서 대한노인회의 입장을 마냥 두둔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2016년 대한노인회가 전국 경로당을 대상으로 실시한 ‘경로당 활성화 실태조사’에서도 경로당을 다니는 노인들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전국 경로당 중 62.2%인 3만 9866개의 경로당 회원들은 경로당의 ‘여가 프로그램’에 대해 불만족스럽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국토부의 이번 법 개정은 경로당의 역할과 존재 이유에 논의하는 또 다른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